누군가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자기소개를 자신 있게 하지 못했다. 아이의 이름이 내 이름을 대신하고 몇 년생인지로 내 소개를 시작하기를 10년, 이제는 다른 수식어로 나를 소개하고 싶다.
30살이 되자마자 5년이라는 경력을 꽉 채우지 못한 채로 일을 그만두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 서둘러 그만두었나 싶기도 하다. 그 후로 지금까지 나는 10년이 넘는 경력 단절녀이자 전업맘으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만큼의 시간 동안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나라는 존재는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으로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애정과 의미를 무의식적으로 가진 것 같다. 아빠는 건설사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셨고, 엄마는 인테리어에 항상 애정을 품고 계셨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장래희망을 적을 때면 줄곧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적었다. 물론 동시 통역사나 가수, 음악가 역시 마음속에 품고 있기는 했지만, 그나마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내가 그중 가장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수능 점수에 맞춰 대학 입학 원서를 넣으면서도 전공은 꼭 건축학과를 고집했다. 4년제 대학 중에 인테리어 학과를 점수에 맞춰서 고르기는 힘들었고, 건축학부가 꽤 많이 있었다. 그렇게 건축공학부에 입학해서 건축설계를 전공하고 졸업 후 건축설계사무소 설계팀에서 일했다. 팀장님은 우리가 디자이너가 아니라 엔지니어라고 현실자각의 시간을 주기도 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이것 역시 예술적 행위의 일부라 믿어왔다.
대학시절 5년 동안 집에서 잠을 잔 날이 더 많았을까, 설계실에서 침낭 하나와 전기난로에 의지한 채 밤을 새우며 쪽잠을 자던 날이 더 많았을까. 이공관 310호. 아직도 잊히지 않는 우리의 공간. 학교의 설계실이나 설계사무소는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마감이 가까워지면 막차를 타고 집으로 겨우 돌아가 4시간 남짓한 시간을 자고 다시 작업하는 곳으로 돌아갔다. 지긋지긋하다면서도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은 예술에 대한 사랑과 동경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자체가 좋았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해도, 퇴근하는 시간에 버스 창밖으로 바라보는 한강의 풍경은 이어폰으로 듣는 음악들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20대 시절을 나는 건축가로서의 희망보다는 예술적 행위를 하고 있는 나 자신에 취해서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야근과 주말 근무 마감이 다가오면 철야까지 일삼는 분야. 그렇게 20대는 작업하기에 편안한 뱅뱅이 안경, 슬리퍼와 후드티가 유니폼처럼 되었고 손목 통증과 위염은 반려병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서른 살. 그때 당시라면 지금의 평균보다는 조금 이를법한 나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었다. 팀장님은 1년만 더 채우고 건축사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따면 그다음은 일을 좀 쉬어도 편할 텐데 지금 그만두기엔 너무 아깝다며 잘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뭘 믿고 그렇게 용기 있게 사직서를 냈던 건지. 그동안 일하느라 고생했던 것을 사직서로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다행인지 아니면 내가 일을 그만두어도 어느 누구에게 아쉬울 게 없어서였는지 주변 사람들은 모두 나의 결정에 훈수를 두지 않았다.
나는 결혼을 하면 아이 갖는 것을 미룰 생각이 없었다. 가정을 꾸리고 화목하게 사는 것이 나의 인생목표라고 생각할 만큼 화목한 가정에 확신과 의무감 비슷한 것을 갖고 있었다. 신랑 역시 나와 생각이 비슷했다. 나는 노력만 한다면 아이가 금방 생길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도 갖고 있었고, 아이를 양육하는 것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여기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나의 직업적 특성으로 인한 불규칙적인 퇴근과 작업 시간 때문에 아이들을 키우는 데에 벌어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멀티플레이에 유독 취약한 나를 알기에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워킹맘의 고통을 이미 다양한 미디어로 너무 많이 접해왔던 터라, 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라는 것은 너무 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일하는 여성의 기혼 선배들은 보기가 드물었다. 남녀 성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여성들 중에 기혼자는 설계팀이 아닌 경영진이거나 칼퇴근이 정해져 있는 팀에서 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건축 설계하는 사람에게 정시 퇴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멋지게 일하는 건축가의 꿈을 내려놓고 가정을 택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다. 직업병인 손목터널증후군, 스트레스로 인한 위염과 피부트러블과 각종 염증반응들이 끊이지 않고 나를 괴롭혔다. 일을 그만두는 것이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라는 핑계를 만들었다.
다행히도 결혼 6개월 만에 우리 부부에게 첫 아이가 생겼다. 결혼하고 금방 자녀계획에 성공했기 때문에 나에게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명분이 분명해졌다. 내가 성인이 된 후 가장 게으르고 나태하게 지냈던 시간은 첫째를 임신했던 10달 동안의 시간이었다. 물론 문화센터에서 배우고 싶었던 유화를 배우기도 했고, 아이를 출산할 때까지 임신부 요가로 건강과 출산에 노력을 했고 마음만은 정말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에 임신부가 누릴 수 있는 권력을 최대한 누리면서 게으르게 누워 지냈다. 아이가 태어나면 내 인생이 통째로 바뀌어버린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그때를 돌이켜보면 볼록한 배를 위로 하고 누워서는 핸드폰 게임으로 두 시간씩 보내고 퇴근할 남편을 기다리며 아무 계획도 생각도 없이 보냈던 형편없는 내 모습을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