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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Nov 02. 2018

폴란드로 간 아이들

누가 그들을 타국의 땅으로 보냈나.

국가가 없으면, 국가가 불안하면 국민은 불안하다. 

우리가 막판에 할말이 없으면 애국심으로 끝나는 이유도, 태극기 부대가 사라지지 이유도 어쩌면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국가는 다른 성질의 것이다.


국가가 우리에게 특별히 해주는 것이 없어도 우리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남북한 전쟁으로 국가의 정체성이 모호해졌을 때, 아이들은 타국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생김새가 전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보살핌을 당했다.

그들은 아이들은 진정으로 보호해야줘야 할 대상으로 대우해줬다. 어른이 어른답게 행동했다. 그것은 본인이 이기적인 목적으로 아이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국가 역시 어른다워야 했다. 아이들에게 대한 책임감은 국가라는 모호하지만 실용적인 개념이 반드시 갖췄어야 할 덕목이었다.  

불안정한 상태의 한국에서는 그런 어른으로서 태도를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매우 통탄스럽다. 


그런데 여기에 중요한 이슈가 발생한다. 자국도 버린 아이들을 타국의 어른들이 돌본다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진심으로 그들을 사랑한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한국 아이들의 얼굴은 똑같았다. 같은 한국사람이 봐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똑같은 머리 모양에 똑같은 옷차림, 그리고 비슷하게 얼어붙은 표정, 불안한 표정...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폴란드 사람들은 한국의 여자아이들은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제 노인이 되어버린 폴란드인들은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아이들은 진정으로 사랑받았기에 북송된 후에도 폴란드인들을 잊지 못했고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북한은 그들의 노동력이 필요했을 뿐이고 폐허가 된 남한은 버려진 고아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그들은 부모를 잃고 국가로부터도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삶의 의지가 강하다. 열심히 폴란드어를 익히고 무용을 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이 다큐멘터리는 극영화를 찍기 전 제작 전 영상처럼 보였다. 한편의 완성된 다큐라고 보기에는 충분치 않은 느낌이었다. 역사의 비극성이 다큐의 불완전함을 커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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