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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Nov 18. 2018

영주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주>는 한예종과 cgv의 산학협동 프로젝트의 하나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에 대한 느낌은 내 경험상 좋았다. 기성작가들에게서 볼 수 없는 수줍은 신선함과 함께 적절한 수준의 대중성도 있다.


<영주> 안에는 여러가지 이야기와 감정들이 담겨 있고 그런 감정이 쉽게 이해된다고 말할 수 없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도 그 감정이 여전히 소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서 자꾸 생각이 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게 감정의 잔상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고 생각한다. 


어느날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불행, 영주는 자신을 찾아온 불행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불행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불행은 불행을 낳는다. 영주는 오기가 생긴다. 그리고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을 찾아가 어거지를 써봐도 괜찮을 것 같은 배짱이 생긴다. 그러나 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튄다. 정말 미워해야 할 사람에게서 살아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됐을 때 생기는 당혹감을 영주는 자신의 방식대로 해석해 받아들인다. 그것은 자신에게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남동생은 영주의 방식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남동생에게는 그것이 최선이 아닌 최악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동생은 누나의 허를 찌르는 방법을 택한다. 

영주가 택한 생존방식에는 속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은 영주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영주는 자신을 딸처럼 생각하고 친절을 베푸는 가해자 부부에게 자신이 피해자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남동생은 가해자 부부가 영주의 정체를 알고도 그녀를 받아들인다면 자신도 누나의 방식을 묵인하겠노라고 말한다. 

순간 영주에게도 궁금증이 생긴다. 자신을 딸처럼 예뻐하는 부부, 특히 아줌마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도 계속 사랑해줄 수 있을까. 영주에게 믿음이 있다. 그동안 아줌마가 보여준 사랑을 믿고 싶다. 그래서 과감하게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동생에게도 보란 듯이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다. 

그러나 영주는 자신의 소박하고 순진한 믿음이 여러 복잡한 감정을 지닌 인간의 세상에서 수학공식처럼 적용되지 않는다는 비정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영주를 안아줬던 아줌마는 어른답다. 하지만 어른은 어른으로서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많다. 세상 풍파에 찌든 어른들은 결코 단순할 수가 없으며 결코 순수할 수가 없다. 남편이 낸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아들과 고아가 된 영주를 위해 기도를 할 수는 있지만 예전처럼 영주를 마주 대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영주는 자신의 기대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순진한 것이었나를 깨달으면서 절망한다.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이에게는 숨쉬는 것조차 힘들만큼 괴로운 일이기도 하다. 

한강다리를 붙잡고 통곡하는 영주는 자신이 다시 삭막한 현실 속으로 던져졌음을 깨닫는다.  가해자 부부로부터 예상치 못할만큼 따스한 사랑을 받고 살아갈 힘을 겨우 얻었지만 이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의 삶을 시작해야한다.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스무해밖에 되지 않은 사람에게 너무 힘겨운 삶이다.  가장 미워해야할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었다는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사방에 적만 남았다. 


눈물을 멈추고 걸아가는 영주의 뒷모습은 어른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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