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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Aug 24. 2017

더 테이블-넌 거기, 난 여기에

식은 찻잔과 남은 욕망들

  세련됐다고 할 수 없는 동네의 작은 카페에 세련됐다고 할 수 없는 테이블에 평범한 물컵이 놓인다. 그리고 그 속에 소박한 흰색 꽃송이들이 꽂힌다. 그러나 클로즈업된 물컵은 놀라울만큼 깨끗하고 투명하게 보인다. 마치 투명한 수채화 같은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의 설정샷처럼 보인다. 그리고 관객은 이미 작은 동네 카페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카페 안으로 입장하게 될 캐릭터들의 소소한 대화와 그 안에 숨겨진 욕망을 엿볼 준비가 되어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면서도 또한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처럼 우리의 욕망을 노출시키는 것에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지만 우리 역시 가끔은 반쯤 벌거벗은 욕망을 스물스물 흘려보내기 때문이다.

마실 것이 놓여있는 테이블은 그런 욕망을 어느 정도까지 내놓을 것인지, 스스로 드러내기도 하고, 적당한 선에 서 통제하는 역할을 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영화에서는 테이블이 캐릭터들 사이에 늘 놓여있다.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잔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멀리 있는 것도 막아주는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너무 노출시키지도 감추지도 말라.

  김종관 감독의 작품은 두편밖에 보지 못했다. 전작인 <최악의 하루>에서도 테이블과 찻잔이 등장한다. 그의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특별한 방향성이 없이 캐릭터들의 산만해보이는 대사들에 의해 서사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가 날 것의 감정을 때론 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대사들 속에 감추고 있다면 김종관의 영화는 적절한 품위를 지키면서 통제력을 잃지 않는다. 파고 들기보다는 보기 편한 지점까지만 허용한다. 그 이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관객의 상상에 맡기겠다는 식의 제스추어도 취하지 않는다. '삶이란 그냥 거기까지만이니 각자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옵니버스 형태의 <더 테이블>을 엮고 있는 네 개의 에피소드는 평범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티테이블에 어울리게 캐릭터들의 정갈한 화법을 보는 재미도 있다.  <최악의 하루> 역시 성격이 전혀 다른 세 명의 남자들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마치 옵니버스처럼 진행된다. 두 영화 모두 등장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못한 채 스크린 밖으로 사라진다. 그들이 남긴 잔에 꽤 많은 양의 음료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과 흡사하다. 마치 잔을 다 비워버린다면 차나 커피, 맥주의 존재가 사라져버리고 그와 함께 자신들의 자취도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것처럼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그들이 주문한 것들이 남아 있다. 심지어 초콜렛 케이크는 손을 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반쯤 남은 맥주, 차포트에 아직도 상당히 남아있는 차는 그 자리에서 미처 마감하지 못한 감정들과 남은 이야기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수많은 사연들이 식어버린 커피처럼 우리 곁을 떠돈다. 차를 다 마실 때까지 머문다면, 그럴 만한 여유가 있다면 우리는 남은 이야기를 다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가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우리의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우리는 그냥 살아갈 뿐이며 그게 전부이다. 한예리, 임수정이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결혼에 대해 애매모호하게 이야기 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어떤 의미를 띄고 있으며 인생이라는 전체 그림에서 어떤 지점에서 어떤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다. 그래서 퍼즐을 맞추듯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조각들이란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귀를 맞추려는 욕망만이 허공을 맴돌 뿐이다.  혹은 아귀를 맞췄다는 착각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아주 잠시동안만 효과가 있을 뿐이지만.

  

  김종관 영화의 인간관계는 깔끔하고 담백하다. 홍상수 영화를 봤을 때, 기분이 더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의 찌질한 본성이 내안에서도 느껴지기 때문에 대놓고 손가락질 할 수 없는 것과는 또 다르다. 김종관 영화와 홍상수 영화는 차이란 차 테이블과 술 탁자의 차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왠지 씁쓸하다. 김종관 영화의 캐릭터들은 자신의 찌질함을 끝까지 감춘 채 자리에서 일어서며 상황을 종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식의 관계가 현 세태의 한 단면을 본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결혼을 하든, 연애를 하든 인간관계는 결코 깊게 진행되지 않는다. 상대에게 심한 부담을 주기 전에 인간관계는 종말을 고한다.  지지고 볶기 보다는 회피한다. 차라리 새로운 상대를 찾는 쪽을 택한다. 설사 그 상황이 반복될지라도.  


  이쯤에서 나는 네 개의 에피소드를 정리해보고 싶다. 에피소드를 지켜보는 기분이 꽤 괜찮았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다음

  남들이 알지 못하는 정보를 취득한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다. 그리고 스타를 알고 있었다는 것, 지금도 연락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또한 실속없는 허상의 권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은 작동 가능성이 있는 상대에게만 먹힌다.  스타가 된 전 여친과 평범한 전 남친의 만남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욕망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이다.  전 남친은 둘 사이에 놓여 있는 테이블을 건너가 기어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야 만다. 그의 유치한 욕망은 묘한 웃음을 띄고 있는 전 여친과 같은 프레임 안에 있음을 증명해주는 한장의 사진으로만 남을 것이다.

 

사진 출처- 다음

   

   상대방에게 나는 어느 정도의 의미가 있는 존재일까 알고 싶은 욕망은 비단 남녀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내 욕망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질 때는 손해보는 기분이다. 손해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칠수록 점점 더 수렁에 빠져든다.


사진 출처-다음

  내 욕망은 언제 어떻게 바뀔지 알지 못한다. '아직까지는 진실' 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정신줄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 설사 내 욕망이 바뀐다고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나란 사람은 내가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어느 지점에서 왜 방향이 바뀌었는지 의식하고자하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 무책임하다는 질책을 받았을 때 최소한 변명거리는 있어야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면피가 되지 않겠나.


사진 출처- 다음  

  현실은 이상과 켤코 친하지 않다. 현실이 되는 순간 이상은 저 너머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면 현실과 이상이 겹쳐졌기 때문이 아니라 이상은 현실 속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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