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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Sep 17. 2017

속이 문드러져도 호탕하고 유쾌하게!

어 퍼펙트 데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생존을 위협할 만한 고약한 사건이 터졌다. 실제로도 살 썩어가는 냄새를 풍긴다. 더군다나 열 받게도 그 사건은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에 의해 고의로 발생했다. 주민들의 생존을 위해 사건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1시간 46분을 끌고 간다. 사건은 해결될 듯하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하지만 지루하지 않다. 포스터에서 다섯명의 캐릭터가 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지는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다 알고 있다. 그들이 보는 것은 우리가 아니지만 우리일 수도 있다.


전쟁의 비참함과 인도주의 사이에 윤활유 같은 유머

  카메라는 보스니아 내전 후에 참담한 모습을 비추고 있다. 평온한 일상이 언제 어떻게 박살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었던 과거에 대한 묘사는 국제구호요원 집단에 갑자기 합류하게된 '니콜라'라는 사내 아이의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관객의 감정 역시 니콜라를 데리고 가는 어른들에게 투사돼 이전과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광경은 이미 사건이 터진 후다. 우리가 보지 못했던 흔적을 더듬어간다는 것은 시체를 보는 것만큼이나 생경하고 소름끼친다.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상상, 즉  보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거짓 기억을 불러 일으키는 광경들이 섬칫하다. 섬칫함과 불안감은 니콜라 차고에 있는 차량이 출발 직전에서 끊겨버린 필름처럼 차 키가 꽂혀 있는 이미지에서 정점을 이루고 정원으로 통하는 차고 문이 열리는 순간 현재로 다가온다. 과거에 대한 상상은 순식간에 현실로 바뀌어버린다. 뒷광경을 보지 못한 순간의 소피(멜라니 티에리 분)는 맘브루(베니치오 델 토로 분)의 표정에서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공포를 느낀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뒤를 돌아 보고 현실을 파악할 것인가, 외면한 채 자신을 보호할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소피가 우연히 맞닥뜨리된 상황은 현재 우리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니콜라의 머릿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교통편만 얻으면 만날 수 있을 엄마와 아빠는 이미 니콜라의 옆에 죽은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과 동일어라는 사실은 매우 기묘하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과 아이들의 존재 여부 역시 불투명하다. 미래가 불투명한 아이들은 공에 집착하며 현재를 버티고 있다. 아이들이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손에 쥘 수 있는 공뿐이다.

  국제구호요원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현상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지뢰가 깔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도 캐릭터들이 견딜 수 있었던 것처럼 관객인 나역시 그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이 쉴 새 없이 내뱉은 유머들 때문이지 않았나 싶다. 낭떠러지가 코 앞인 협소한 길 한가운데에 놓인 소의 시체 앞에서 B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를 선택을 해야하는 긴장감을 유머와 교환한다. 원칙을 강조하는  현장분석가 카티야 (올가 쿠릴렌코 분)를 놓고 B는 맘브루에게 매우 현실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위기를 넘기기를 종용한다. 물론 그것 역시 관객을 즐겁게 해주는 유머다. 심지어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었을 법한 니콜라까지 유머로 어른들을 상대한다. 그가 집에 있다고 했던 밧줄부터 시작해 폐허에 혼자 남아 살기만 등등한 자신의 집 개를 놓고 던진 이야기들은 모두 관객에게는 곧바로 유머로 접수된다.  

 

   영화의 엔딩씬 역시 유머로 마감한다. 원칙을 내세우며 우물 안에 던져진 시체 인양 직전에 밧줄을 끊는 속터지는 UN의 행태를 비웃는 폭우 속에 우물 위로 떠오르는 시체 역시 비참한 현실 속에 둥둥 떠오르는 유머다. 물에 퉁퉁 불은 거구의 시체가 몸을 뒤집은 채 깔깔 웃는 듯한 느낌이었다.


여성성과 남성성의 대비 혹은  케미


  통역사를 제외하고 남성 두 캐릭터와 여성 두 캐릭터로 이루어진 구호단체요원들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전쟁지역까지 와서 구호활동을 할만큼 네 명의 캐릭터는 정의롭고 인류애로 무장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사건을 해결하는 방식은 대조적이다. 원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고 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는 그렇게 설정했다.   

  여성들은 원칙을 고수하면 일은 제대로 풀릴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실과 원칙은 별개의 것임을 남성들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한다. 생존보다 원칙이 우선시 되면 안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주지시키는 영화의 서사관습을 이 영화에서도 적용시키고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우물을 살려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실행하는 것은 남성이다. 매달린 시체에서 밧줄을 떼어내고 우물 속 시체의 몸과 자신의 살을 맞대면서 밧줄을 거는 것또한 남성들이 한다. 맘브루와 B는 시체를 보면서도 미세한 표정도 바뀌지 않는다. 경고를 무시하고 매달려 있는 시체를 본 소피는 너무 놀라 비명소리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지만 시체를 쳐다보는 B의 얼굴은 그토록 원하던 밧줄을 발견한 탓에 마치 자비로움을 발견한 듯 온화하다. 일을 해야 하니까 시체 썩은 냄새를 막기 위해 코 위까지 복면을 올리는 두 남성들은 의연하고 매우 멋져보인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사지까지 온 여성들의 태도는 그와 다르게 묘사된다. 길을 가로막은 소의 시체 때문에 하룻밤을 차 안에서 새워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도 카티야는 기지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에 화를 낸다. 그리고 맘브루와 얼굴을 맞댈 기회가 생기자 애인이 있는데도 자신을 속이고 관계를 맺었던 과거의 일에 대해 항의한다. 맘브루에게는 중요치 않은 일이라 귀찮기만 하다.

  전형적인 것으로 규정된 남성과 여성의 기질을 놓고 웃음이 나오게 만드는 것 또한 영화 서사관습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B는 심지어 맘브루에게 분석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카티야와 잠자리를 하라고 강요함으로써 관객으로 부터 웃음을 끌어낸다. 사건 해결을 위해서는, 혹은 현재 자신이 처한 현실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원칙이 무엇이든, 혹은 애인이 있던 말든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남성이지만 여성은 틈만 있으면 그 당시에 무슨 생각으로 그런 비양심적인 행동을 했는지, 왜 원칙대로 하지 않는지 따지고 든다. 그런 태도가 오히려 상황에 따라서는 정의 구현이라는 목적 달성에 큰 역할을 하는 영화도 있다. 이런 성적 전형을 바탕으로 하는 서사적 관습은 익숙한 것이고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저항감이 적어 자주 사용되지만 이 영화에서는 구호활동을 위해 사지도 불사할 정도로 평범하지 않는 여성상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있다. 길을 폐쇄한 군인들 앞에서 평화협정이 이미 체결됐는데 전달이 안 된 것 같다고 우기는 소피처럼 대의를 위한 열정은 있지만 현실감각이 부족해 유연하지 못한 여성 캐릭터의 역할은 거칠 것 없는 남성 캐릭터들의 역할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실용성 없는 원칙을 앞세우는 시스템 앞에서 무력하기는 마찬가지다.              

  구호활동 목적으로 현지에 도착한 인간의 힘은 무조건적인 원칙 앞에서 거의 무력화되고 이를 해결한 것인 바로 자연현상이라는 점은 씁쓸하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이것 역시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예상치 못했던 유머다. 인간들이여, 아무리 잘난 척해봤자 자연 앞에서는 무력하기 그지 없는 존재니까 절대로 자만하지 말지어다.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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