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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Dec 22. 2017

삶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영화

  지금 사는 아파트로 십년 전에 이사를 오면서 내게도 서재가 생겼다. 이사를 결심하게 된 첫 번째 이유가 바로 나의 서재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안 하는 주부더라도 나는 서재는 꼭 필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나 혼자 들어가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도 줄을 서듯 가지런히 세워져 있는 책들을 둘러보면서 그 속에 담겨 있을 영혼들을 상상하며 지켜볼 수 있는 공간 말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좀 으스스한 느낌도 드는데 책들을 둘러보자면 수많은 책 제목들이 스치듯 지나가면서 뭔가 내게 소리를 내지르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대체 나를 어떻게 할 셈이야?’ 이렇게들 외치고 있었다. 책을 사서 모으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절대 따라가지 못해서 나는 늘 책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이다. 때로는 날 압도하는 느낌까지 들어서 숨이 막혀 억지로 고개를 돌리기도 한다. 한쪽 벽면을 서가로 장식해 빼곡히 채운 가운데 앉아있자면 뿌듯함과 압박감이 교차한다. 또한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시네마 천국>으로 유명한 주세페 페르나토레 감독이 2013년에 만든 <베스트 오퍼>라는 영화에서 최고의 실력을 갖춘 미술품 경매사는 까칠하기 그지없는 독신인데 여성이라고는 곁에 두려고 하지도 않는 완벽주의자이자 그야말로 결벽주의 신경증자다. 그런 그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것은 그림 속에 그려진 여인들이다. 그는 진품임을 알면서도 모작이라고 판정해 가격을 낮춰 동업자를 시켜 사게 한 뒤 자신이 수집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그림을 모은다. 공통점은 모두 여성의 초상화라는 점이다. 그는 여성이 그려진 명품들을 거대한 금고 같은 비밀의 방에 보관한다. 자신에게만 허락된 공간이다. 경매사가 여인들의 초상으로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 앉아 황홀경에 빠져 눈을 감고 있던 기이한 장면이 생각났다. 


  나는 물론 완벽주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며 사춘기 시절 한동안 결벽 증세를 보여서 화장실 갈 때 입는 옷을 따로 정해놓고 입는다거나, 밥 먹을 때 숟가락을 빤히 들여다보며 매의 눈으로 체크했던 기이했던 시기를 제외하고는 지금은 집 청소보다는 몸이 편한 쪽을 택하는 불량주부다. 뻔한 변명을 하자면 나는 한동안 거의 주부 역할을 하지 못했다. 늘 집에 있는데도 말이다. 언젠가부터,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후부터 집은 내게 작업의 공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작업 공간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작은 거실이 내 작업 공간이 됐다. 거실이 작업 공간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20년 전이었던 그 때만 해도 우리 집에 TV는 거실에 한 대뿐이었고 내 작업은 VCR와 TV, 그리고 노트북 이렇게 세 가지 장치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영상번역작가라는 약간 애매한 타이틀을 갖게 됐다. 애매하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번역가와 작가를 붙여놓은 명칭 때문이다. 나는 주로 영화(때로는 다큐멘터리와 TV드라마)를 번역했는데 책을 번역하는 사람을 주로 번역가라고 부르는 반면에 영상번역은 굳이 작가라는 칭호를 뒤에 붙여줬다. 영상번역은 글자 수의 제한 때문에 직역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의역을 피할 수 없기에 창작적 재능을 존중해 작가라는 명칭을 붙여준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의바른 관계자가 작가님이라는 칭호를 붙일 때 어색한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작가라는 말은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되는 성스러운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인터넷에 글을 쓰고 자신의 글을 공개하는 세상이 되어서 그 작가란 대학교 때 괴테와 쉴러, 노발리스를 읽고 배우던 내가 생각했던 범접할 수 없음과는 동떨어진 평범한 의미를 지닌 단어가 된 듯하다. 모니터를 통해 인쇄체의 글씨가 나타나는 느낌은 이제 특별하지가 않다. 


  하지만 내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만 해도 활자화된 자신의 글에 대한 매력은 정말 짜릿했다. 문학이 꽃피었던 그 시절에는 문학청년들이 많았다. 자신의 글이 누구에겐가 읽힌다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붕 뜨는 것 같았다. 졸업하던 무렵에 타자기가 유행이었고 나 역시 마라톤 타자기를 구입했다. 타자글씨는 손 글씨로 원고지에 쓰던 것과는 다른 또 다른 흥분을 주었다. 인쇄체의 글자가 가지런하게 박히는 것만 봐도 자신의 글이 객관적으로 가치를 평가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성경 공부 동아리의 한 남학생 역시 시를 습작하고 있었는데 내가 누군가의 부탁을 받고 타자를 치는 모습을 보더니 자신의 시를 타자로 쳐달라고 했다. 나 역시 독수리 타법이었지만 대부분이 타자를 못 치는 사람들이라 꽤 빠른 편이었고 나는 보란 듯이 요란한 기계음을 내면서 글을 찍어줬다. 나는 활자가 박힌 종이를 받아드는 그 남학생의 얼굴에 자족감이 번지는 것을 봤다. 손으로 쓴 글과는 달리 권위가 느껴지는 인쇄체의 글이 주는 마력이었다. 지금은 인쇄체 글씨의 권위에 속는 시절이 아니다. 인쇄체 글자만으로는 더 이상 권위가 서지 않는다. 

  

  나의 번역이 자막으로 깔려 비디오로 출시됐을 때 역시 뿌듯함과 흥분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술의 발전은 영상번역 영역에서도 민감하게 반영됐다. 처음에는 타임코드가 찍힌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영상을 보면서 번역작업을 했으나 매체는 곧 시디로 바뀌었고 그 다음에는 웹에 접속해 다운로드를 받는 것으로 바뀌었다. 시대의 변화를 나는 영상 매체의 변화로 감지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내 아이들이 친구들을 데려와 거실을 뛰어다니는 와중에도 난 전쟁터의 종군기자처럼 노트북을 붙들고 씨름을 했으니 나만의 작업실에 대한 바람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사를 가려면 방은 최소한 4개는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성별이 다른 아이가 둘이니 각자 하나씩 줘야 하고 하나는 침실, 나머지 방 한 개는 서재 겸 작업실이 되어야 했다. 이사를 간 뒤 나는 엄청나게 긴 책상을 주문 제작했고 기역 자로 놓을 수 있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곳은 나만의 공간이 아니었다. 남편과 공동으로 쓰려고 만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남편이 주로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느라 시간을 보내자 그 방은 거의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방의 용도 역시 바뀌었다. 그곳은 이제 더 이상 번역하는 작업 공간이 아니었다. 번역이라는 작업은 보람 있지만 괴로운 작업이다. 영상번역의 경우 틀에 맞춰야 하고 상황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화와 정서까지도 이해를 해야 하며 책의 경우 원작자의 머릿속에 들어앉을 수 있을 만큼 생각을 읽어내야 한다. 오역이나 오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다. 특히 일이 몰리는 시즌이 되면 잠을 줄이면서 정신과 육체노동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열정이 넘치고 에너지가 소진되지 않은 터라 잠잘 시간이 없어도 행복했다. 에너지는 고갈됐다가도 금방 다시 채워졌다. 식구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 한밤중을 지나 바깥에서 어슴푸레한 하늘빛이 거실로 스며들어올 때도 많았다. 고독했지만 고독하지 않았다. 영화 속의 캐릭터가 늘 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두세 시간 자면서 시리즈물을 한달 내내 번역하다보면 잠을 자려고 누워도 잭 바우어의 목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하지만 마법의 세계에 빠진 것처럼 난 중독돼 있었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 지 십년이 다 돼가는 어느 날 이젠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나는 슬쩍 그 세계로부터 빠져나왔다. 가끔 열정에 취해 나 혼자만의 세계 속에서 행복해하고 힘들지 않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지만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번역을 그만 둔 후에도 나는 계속해서 영화를 봐야만 했고 이번엔 오히려 더 신경 써서 봐야했다. 영화 이론 공부를 하겠다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던 것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난 석사과정 학생들의 평균 나이가 그렇게 낮은 줄 몰랐기 때문에 씩씩하게 지원했다. 면접장에서 내 생년월일을 확인한 교수님들이 왜 당황하는지 몰라서 나도 눈을 빤히 맞추고 어리둥절해 했으니 때론 모르는 게 도움이 된다. 그리고 나는 영화의 다른 부분들을 보기 시작했고 그것 역시 당황스러웠다. 여태 나는 입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번역 역시 날 힘들게 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인 느낌이란 예전엔 영화랑 까불고 놀았다면 이제는 애써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씨름을 하는 사이가 됐다.    

  

  TV도 점점 사이즈를 키워가며 발전했고 예전엔 상상할 수도 없을만한 크기도 점점 작게 느껴졌다. 더 이상 클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집 TV가 88인치라는 백화점의 거대한 신제품 앞에서는 손바닥만 해 보였다. 나의 다음 선택은 프로젝터였다. 모니터 크기에 비례해 가격이 급상승하는 TV에 비하면 엄청나게 저렴하면서도 스크린의 크기는 물론 화질도 만족스러운 편이었으며 무엇보다도 프로젝터의 렌즈에서 쏘아내는 빛이 영화관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에 몰입도가 더 좋았다. 엄마의 자궁과도 같은 깜깜한 공간에서 스크린에 압도되는 느낌은 늘 좋다. 그렇다고 해도 영화관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영화관에서, 집에서, 급할 때는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를 통해 보는 영화는 아무리 봐도 고갈되는 법이 없다. 늘 새로운 영화들이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온다. 게다가 한번 본 영화라고 안심할 수 없다. 기억은 늘 지워지기도 하고 왜곡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경증자 재스민의 영화로 버티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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