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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 재스민 Aug 27. 2016

늘 반복되는 것들-어떻게 살아야 옳은 것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 - 사라진 키팅 선생님들


재개봉한 <죽은 시인의 사회>는 1989년도 영화다. 그 영화와 우리 사이에 3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인 틀은 변한 것이 없다. 규격화된 공부기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획일적인 교육방식과 그것이 자식을 위한 최선의 길이라고 굳게 믿는 학부모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다양한 형태의 학생들.


높은 명문대학 진학률을 최고의 자존심으로 내세우는 교장선생님과 기계처럼 지식을 읊조리는 교사들의 모습은 너무나 낯익은 모습이다.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다니는 여학생들의 기묘하지만 이제는 낯익은 모습을 보면서 세상이 변했다고 느끼고 싶지만 갈등구조의 틀은 여전하다.


젊은 시절은 세상과 부대끼며 살아왔던 부모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위치가 가장 유리한지 안다. 그래서 성공한 부모는 그런 부모대로 성공하지 못한 부모들은 그런 부모대로 자식에게 똑같은 길을 강요한다. 의사, 변호사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고 하겠다. 성향이 그런 직업과 그런대로 맞을 경우, 또 세상을 사는 가치관이 부모의 것과 맞을 경우에는 문제가 없다. (적절한 예가 의사집안에서 의사되기, 법조인 집안에서 변호사되기이다. 자라면서 자신이 갈길이 그길이라고 알게 모르게 결정되는 경우다. 그것이 문제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진로를 정하는 데 시간의 낭비가 없는 경제적인 방법이 된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것이 실제로는 그길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서 깨닫는 일이 생기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조역으로 그런 성향의 학생이 나온다. 가장 현실적으로 상황을 판단해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향을 심적 갈등 없이 택한다. 다른 학생들도 결국은 그 방향을 택해서 겉으로 보기엔 같아보이지만 그들 마음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다르다. 그 다름이 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 다름이 키팅 선생님이 떠날 때 책상위에 올라가는 그 유명한 퍼포먼스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그 행위가 결국 키팅 선생님을 살렸다.

떠나는 길을 행복하게 만들어줬고 그 기억을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게 했으니까.  


문제는 애초부터 자식이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 부모과 맞지 않을 경우다. 대개는 예술 계통이 그 영역에 속한다. (요새는 예외적인 경우도 많다. 즉 어릴 때부터 성공적인 연예인이 되길 원하는 이른마 스테이지 맘들이다.여러 기획사들을 찾아다니며 오디션을 보고 배역 캐스팅에 열을 올린다. 이 경우 역시 전자와 마찬가지의 문제점을 낳는다)


사실 현재 자식의 성향, 생각, 가치관을 그대로 믿기에는 위험성이 많다. 경험이 많은 세대의 눈으로 볼 때는 적어도 그렇다. 사람의 생각은 계속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해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환상이 작용하게 돼 그것이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가 부모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그러면 지금 이렇게 살진 않을 거야'라는 멘트 역시 우리 귀에 낯익은 것이다. 세상과 부딪히면서 생각은 바뀌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진 부모라면 자식이 과거의 자신처럼 원하는 길을 가려고 할 때 강력하게 목숨걸고 반대할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일이기 때문에. 하지만 자식은 자신과 다를 수도 있다. 물론 같은 결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란 애초에 우리에게 없기 때문이다. 현재 시점에서 정확한 판단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과가 나왔을 때 거슬러 판단되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부모는 소중하기 그지 없는 자식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 정답은 물론 없다.


하지만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핵심 문구이기도 한 '카르페 디엠'이 거기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그것은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흥청망청 현재만 즐기라는 뜻은 아니다. 미래는 어차피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 당시 그 시점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잘못되더라도 그것은 남을 탓할 수 없기 때문에 잉여가 남지 않는다. 설사 잘못되더라도 그 결과를 수용할 능력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부모도 자식도 마찬가지다.

   

시를 읽는 방법을 마치 수학 공식처럼 도식화한 글을 읽는 장면은 우리가 입시를 위해, 경직된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감수성과 개성을 빼앗겼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정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또한 실패하더라도 여유롭게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씨앗이 될 수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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