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부터 커피까지
연기는 환상적이다. 자신이 만들어내는 연기는 더욱 더 환상적이다. 담배 연기에 싸인 자신의 모습도 당연히 몽환적이다. 대학생 때 피워봤던 담배의 뒷끝은 묘했다. 진한 블랙커피의 뒷맛과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그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니코틴 향이 있었다. 그 때 잠깐 피워봤던 경험이 다지만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그 맛이 코 안에서 느껴지는 건 신기한 일이다. 그런 맛이 느껴지는 때의 공통점이 있다. 뭔가에 몰두하고 싶을 때 나는 이삼십년 전에 짧게 마셔봤던 담배의 뒷맛이 뇌속의 어딘가에서 기억된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담배를 피우면서 무슨 일에 몰두했던 기억이 없다. 카페에서 잠깐 담배를 몇 차례 피워봤던 기억이 다이다. 그런데도 나는 가끔 담배 냄새의 환각을 경험한다.
아버지는 담배를 많이 피우셨다. 오른쪽 세째 손가락의 손톱이 니코틴 때문에 누런 색으로 변색돼있었다. 담배의 냄새는 아버지의 냄새였다. 뭔가 찌든 냄새였지만 아버지의 냄새였기에 나는 담배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담배를 든 채 활짝 웃고 찍은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행복해보였으며 마치 담배와 함께여서 행복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진 속에서 손가락 사이에 끼워져 있는 희고 가는 담배는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하고 당당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분들도 대부분 담배를 피우셨고 그들이 든 담배들은 마치 그들 사이에 형성돼있을 공감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담배는 환상을 만들어냈다. 문인들이 손에 들고 미소짓는 흑백 사진에서는 담배는 마치 영감의 촉매자 같았고 피곤에 지친 노무자들이 얼굴을 맞대고 피우는 담배는 고단함의 위로자 같았다. 그리고 허연 머리를 쪽진 할머니의 손가락에 끼워진 담배는 세월의 깊이를 덤덤하게 바라보게 하고, 지난 세월을 음미하게 하는 영사막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진 아버지는 담배를 끊으셨고 우리 집에서는 담배 냄새가 사라졌다. 그리고 담배 연기가 사라진 만큼 아버지의 짜증과 신경질도 늘었다. 나는 차라리 아버지가 평화로운 표정으로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담배를 피울 때가 그리웠다. 그리고 대학생이 된 뒤, 앞에 앉은 남학생이 피우던 담배냄새에서 아버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처음보는 남학생에게서 잠깐 친근함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담배가 대체 뭐길래. 나는 어둑한 카페에서 담배를 피워보았다. 기억나는 것은 담배의 뒷맛이었다. 니코틴의 맛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진한 커피를 마실 때 커피의 뒷맛에서 그 때 잠시 피워보았던 담배맛의 기억이 떠올랐다. 맛이나 향의 느낌을 표현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은유법을 쓴다. 맛집 탐방 프로 같은 데서 진행자는 자신이 방금 먹은 음식을 표현하느라 모든 은유법을 다 동원한다. 그럴 때 제법 창의적인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난 지금도 가끔 이유없이 가끔 떠오르는 담배의 뒷맛을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뭐라고 대치할만한 표현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흡연자들이 느끼는 담배맛도 그런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다. 내 뇌 속에 각인돼 아직도 틈만 있으면 나오고 싶어하는 나만의 담배맛이 있다. 그 맛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담배를 살짝 문 느낌이 든다.
실뱀처럼 몸통을 빠져나온 담배 연기는 사방으로 스며든다. 머릿속으로 이불 속으로. 담배에서 우아하고 야한 몸짓으로 빠져나올 때와는 달리 스며들고 오래 머문 담배 연기는 더 이상 상쾌하지 않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담배 연기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느끼지 않는다. 담배는 그리움 대신 짜증으로 바뀌었다. 길에서 앞에 가는 보행자가 담배를 피우면 가장 짜증난다. 그래서 숨을 참은 채 앞으로 튀어나간다. 이제 더 이상 카페에서도 담배피는 사람들이 없어서 좋다. 담배는 그냥 내게는 환각으로만 존재한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은 담배를 입에 문 채, 손가락에 끼운 채, 쉴 새 없이 이야기한다. 자신의 생각이 마치 담배 연기로부터 나오듯이 담배와 호흡을 함께 한다. 담배를 눌러 끄는 순간 생각도 멈춰버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담배는 얼굴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이미지와 동떨어져 생각할 수가 없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이미지를 담배가 반영하고 있는 것 또한 담배가 주는 환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