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지도 않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그런 세계
나와 살아온 세계가 다른 사람과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에는 무척 피곤해 했지만 지금은 곧잘 하는 편이다. 대화가 얽히고 섞일 수록 더욱 그 대화 속에서 파고들어서 듣고, 묻고, 또 나도 답을 하고, 생각해 본다. 그건 뭘까, 왜 그럴까, 생각하는 바를 얘기도 해보고. 그렇게 이런 저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는 두세시간은 너끈히 지나간다.
오늘은 숱한 주제중에 어쩌다가 명품과 교육 이야기가 지나갔다. 그 중 명품 이야기는, 최근 내가 알게 된 한남동의 어느 빈티지 명품 취급 숍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알게 되어서다.
나는 사실 명품을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다. 싫지도 좋지도 않은 그것은, 그냥 나로부터 먼 세계의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그 계급 본능 보다는, '나와 어울리는 것을 찾지 못해서'가 아마 제일 딱 맞는 이유 1순위인 것 같다. 한참 모든 2030 여성들이 루이비통 스피디백 같은 것을 모두가 들고 다닐 때도, 나는 그 풍토(라고 해야할까)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공감도 하지 못했다. 물건의 가치는 모든 물건이 쓰이는 만큼 갖는다고 생각하기에, 가품이 아니기만 하면 크게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그들이 늘 매일같이 그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니,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착장과도 어울리지 않고, 옛날 명품백은 가죽이 상당히 무겁고 두꺼워서 오랫동안 들고 다니기는 피로감이 컸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좋아하고 매일 모시고 다닌다니..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밀라논나 할머니는 이제 힘드셔서 무거운 가죽가방 못 든다고 가벼운 가방이 좋다고 하시는데, 할머니 저는 30대 초반부터 가벼운 가방만 들었어요...)
내가 좋아하는 특정 브랜드가 있지 않아서 내 친구들이 생일에 가방을 사 준 적이 있는데 좀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꽤 줘야하는 어떤 브랜드였는데. 여하간 그 때는 연령도 어릴 때고 그런 소비를 해서 사준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내가 보지도 않았으나 내가 딱 좋아할 가방을 사줬던 것이 감동적이었다. 크로스 끈이 있고, 포켓이 양 옆에 달렸고, 크로스 끈을 떼면 귀엽게 들 수도 있는 사각형 백. 우연히 집에 물이 스며 가방이 망가진 때에 집주인에게 화난 강아지처럼 왕왕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친구들이 어떻게 사준 가방인데.. 아주 속이 상했더랬다. 그 시기에 비싸고 예쁜 백이란 것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쓸모있고 예쁘고 나에게 어울리는 건데 친구들이 사준 좋은 가방.
그 뒤로도 일부 몇 개의 브랜드에 관심은 가져보았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소비해서 가지고 다니기에는, 내 착장 스타일이 요일마다 중구난방이고 내가 즐겨입는 어떤 룩이나 분위기에 정착을 못 했다. 어울린다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요즘서야 4-5년 전에도 산 옷을 이리저리 잘 활용할 정도로 대강은 못나지 않게 입고는 다니는데(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 전에는.. 잘 모르겠다. 그 시기부터 지금까지 명품을 소비하는 것 자체에 휩쓸려다니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이 잘했다고 생각한다. 혹은 지금처럼 아주 다양한 브랜드와 꽤나 자주 쏟아지는 신상품 정보가 많지 않아, 좁은 세계에 광적으로 몰입하는 풍토를 보자하니 공감이 더 안 된 것도 있을 거다.
그렇게 미각을 잃은 사람처럼 명품과는 인연이 없나봐, 하고 쭉 살다가. 최근 3-4년 사이 망원동의 탁월한 어떤 가죽 공방 스튜디오 덕분에 가죽의 매력과 디테일의 세계에 빠져 몇 개를 소비했다. 이제 이런 제작 가방에 정착하는 게 나에게는 맞는 것 같다, 고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 3-4년 전부터 기성품 가방이나 옷의 디자인을 무제한 탐색하는 일을 그만뒀다) 다들 실용적이고 아름다운 제품들이다. 유용하면서 아름다운 제품이라니, 나는 사실 조금 만들고 비싸게 팔고 구하는 것 자체에 열을 올려야 하는 그것들보다는, 나에게 착 맞고 너무나 유용하고 심지어 아름다운, 그 가치에 푸욱 빠진 것 같다.
오늘은 오랜만에 명품을 소비하진 않지만 블로그에 올려진 빈티지 가방들과 룩에 어울리게 잘도 찍은 사진들을 보면서, 역시 어울리는 것, 본인에게 잘 어울리는 것을 적재 적시에 소비하는 것, 그것을 잘 활용하는 것... 그것이 제일 중요한 것 아니냐는 생각으로 매듭지었다. 무엇을 사도 본인 것이 아닌 것 같은 가방을 들고 다녀서 도대체 어떤 자랑을 할 수 있을까. 그랬다가는 샤넬백을 머리 위에 모시고 다니는 전철의 출근길 여성1이 되고 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 자기 자신이 좋아하는 룩, 어울리는 룩, 그래서 기분을 내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착장, 평소에도 가볍게 함께하고 싶은 아이템, 그런 것들이 결국은 내 곁에 오래 남는다. 관리해가며 아껴 쓰고 시간이 훌쩍 지나면 그렇게 빈티지가 된다.
세월이 지나도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명품은 무엇이든 그 가치만큼 많은 노력과 신경을 기울여 만들어지고, 관리되어 소비자들 품으로 찾아간다. 그 값어치를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 소비하고, 기꺼이 즐겁게 자주 활용하고, 함께 즐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왕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