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보통 날

출근지옥, 견디며 나아가는 날들

이것 또한 삶의 한 과정이려니

by 그레이스



강서에서 강남으로, 그 구호선을 타고


2018년 9월부터 매일 아침 8시 40분에 9호선에 오릅니다. 강서에 자리를 잡은 죄로, 9호선을 타고 출근해야 하는 운명에 놓인, 뉴스에 나오는 그 '9호선에 찡겨 강남으로 고되게 출근하는 불쌍한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간 걸어서 10분 거리, 전철을 타고도 30분 거리의 직장으로 편하게 출퇴근했었습니다. (출근시간이 8시로 아주 이른 편이었지만) 그 덕에 저는 이른 아침 등촌동 동네 풍경과 알싸한 아침공기, 서둘러 멀리 출근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끝나면, 해가 지기 전인 5시에 퇴근해서 일찌감치 내 일상을 챙기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습니다. 짬짬히 마트나 시장에 들려 장도 직접 보아서 들어가고, 집에 가면 장 본 것들로 직접 요리를 해서 저녁을 잘 챙기기도 했습니다. 종종 인문학, 브랜드, 마케팅에 관한 모임도 잘 참석했고, 지인들과의 모임에서는 늘 1등으로 도착했습니다. 책을 읽을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상대적으로 넘쳤습니다. 이른 아침 하루를 시작한 만큼 저녁의 일상도 길었기 때문입니다.

5시 퇴근 후 집으로 '걸어서' 가던 길의 풍경. 1년 내내 해가 떠 있는 낮에 슬렁슬렁 걸어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그립네요.
그 길 중간 언덕에는 이렇게 쌀집 겸 과일집이 있었는데, 흥정하는 정겨운 풍경도 자주 보았습니다. 저는 유통사를 다녀도 이런 풍경이 좋더라고요.

회사를 멀리 옮긴 이후, 상대적으로 저런 여유와 일상의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많이 사라졌고, 종종 쉽게 무기력해졌습니다. 저녁 시간은 너무 짧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7시'로 달라진 퇴근시간 때문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고,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것에는 '물리적이 거리의 가까움'이 주는 혜택이 있었다는 것을요.


아주 오래 전에는 저도 1호선, 7호선, 2호선을 순서대로 경험하며 '이렇게 밥벌이가 힘들어서야 원' 하며 터덜터덜 출퇴근길에 올랐습니다. 연차가 쌓일 시점 즈음, 출퇴근 거리가 짧을 수록 스트레스를 덜어내고 마음의 여유를 찾기가 훨씬 편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직장 근처에서 사는구나, 하는 것도요. (저는 아직까지도, 집은 집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 근처나 소위 핫플레이스 주변이 아닌, 평범한 주택단지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늘 생각하며 출근하는-여유로운 퇴근길 후에 만나는-한낮의 까페.


다시 시작된 혹독한 출근 수련


최근서야 아침마다 9호선을 타고 전쟁처럼 일터로 나아가는 사람들 틈에서, 여러가지를 새로이 깨닫고, 되새기며, 발걸음을 꼭꼭 밟아나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가 같은 일을 하지 않고, 모두가 각자 다른 인생을 산다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일터를 향해 가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했고, 며칠이 지나 익숙해지면서 피곤해졌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날 한 시에, 비슷한 방향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세상이 참 너무 살기 힘들다,
그런 생각을 쉬이 하게 됩니다.


서로의 얼굴에 피곤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것을 보게 되고, 손잡이가 없이 빼곡히 서서도 피곤한 노동자들은 서서도 눈을 감고 살짝 잠을 청합니다. 멀뚱히 서 있으면 공연히 남의 전화기 스크롤 내용을 다 보게 되거든요. 우연히 앉게 된다면 아주 좋지만, 그렇지 못하면 대개는 전화기로 무언가를 합니다. 저는 요즘 책을 읽거나 영상을 봅니다. 40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람들 틈에서 서서 버티는 것에 슬슬 아주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래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가 봅니다.

9호선 (하행) 급행 여의도역에서 겨우 앉았을 때.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지고 있어 앉아서도 매우 불안하게 긴장해야만 하는. 내 앞에 누가 서 있는지도 무척 신경이 쓰입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은 아주 힘든 날이 있습니다. 우연히 여의도역쯤 자리가 나서 반절 넘는 구간을 앉아서 이동할 수 있음에 감사하려는 찰나, 사람들이 앉은 제게 쏟아질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한 차량에 탄 상황이었습니다. 앉는 사람이 서서 가는 분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해야할까요. 내 앞에 나보다 연로한 분들이 서 계실 때는 더 합니다. 안쓰러움과 이기적인 마음이 내 안에서 서로 싸우곤 합니다. 그럴 때는 괜히 질끈 눈을 감습니다. 그냥 자버리자, 싶은.

참 여러가지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신기하게도. 이 출근 전철 하나에서.


그렇게 오피스가 몰린 신논현-선정릉에 다다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리고, 비로소 9호선에도 쾌적한 공기와 평화로운 순간이 찾아옵니다. 안도의 한숨들이 쏟아집니다. 자리를 둘러보면 조금이라도 앉아가려고 다들 앉기 바쁩니다. 어서 단 1분이라도, 이 긴장을 풀고, 숨을 쉬고 싶어집니다.

선정릉역에 다다르면 매일 보는 상쾌한 시선 지점. 내 앞의 가방과 발들이 모두 사라졌을 때. 이대로 누워 자고싶은데.. 곧 저는 봉은사역에 내립니다. ㅠㅠ
그렇게 하루를 만들어나간지 고작 6개월차, 이제 조금 내공이 생겼습니다


매일 '참을 인'을 새기며 출근하고 퇴근하고를 반복한 지 6개월차, 적응의 동물은 역시 잡초처럼 강인하게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고 버티고 또 살아갑니다. 같은 전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또 전철 내 안내방송을 하며 '늘 죄송한' 기관사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또 나보다 멀리 일산에서, 남양주에서 출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이에서 조금의 안도를 해 봅니다. "그래도 한번에 가잖아."소리를 들으면서요. 보잘 것 없는 일상에 재미도 만들어 갑니다. 출근길엔 미드도 열심히 보고, 책도 열심히 보고, 퇴근길에는 마주치는 다양한 사람들을 관찰하며 여러가지 상념을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또 하루 지나가는구나, 나도 여러분들도. 괜히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면서요.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9호선 동지 여러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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