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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질감

비를 주제로 한 노래들에 대해

by Yameh

금주의 일기예보에 의하면 일주일 간 장마 같은 한 주가 될 것이라 한다. 그 예상에 부합하게 월요일부터 본격적으로 비가 오기 시작한다.

물론 내가 사는 동네는 집중 호우 시에 가끔 잠겨 심심찮게 뉴스를 타는 동네이다 보니, 폭우 예보가 있으면 신경이 곤두서는데 다행히 폭우로 잠길 정도의 양은 아닌 것 같아 안도감이 든다. 비가 잦아드는 것 같기도 하고 찌뿌둥함을 떨치기 위해 약한 비 속에서 걷고 싶어 밖으로 나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문득 비를 주제로 한 노래들, 아니면 노래에 비가 들어가는 노래들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모든 노래를 알 수 없고 지극히 내 개인적인 관점에서 아는 노래들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특히 나는 이 곡들 중 ‘하늘에서 노래가 내린다’는 느낌, 즉 비가 가진 감각적인 ‘질감’을 음악적으로 잘 표현한 곡들이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에 닿았다. 단순히 비가 나오는 노래가 아니라, 그 소리나 분위기가 비 자체의 질감을 담아낸 곡 말이다.


일단 걷다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곡은 Bruce Hornsby and the Range의 ‘Mandolin Rain’이었다. 제목과는 달리 떠나간 그녀를 생각하면서 듣는 빗소리는 떨어지는 빗소리가 만돌린처럼 들린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 만돌린을 연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듣기에 이 곡을 연주하는 악기에 만돌린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곡을 듣다 보면 정말 비가 만돌린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왠지 비 오는 날 걸었던 북한산 둘레길에서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소리 같은 노래 같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비’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노래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의 질감’을 노래에 담은 곡들이 무엇인지로 궁금증이 좁혀졌다. 그렇게 생각난 노래들은 다음과 같다.


- 정태춘·박은옥 - 92년 장마, 종로에서

- Uriah Heep - Rain

- Guns and Roses - November Rain

- 이은미 리메이크 버전 - 신중현의 봄비

- 최헌 - 가을비 우산 속

- X Japan - Endless Rain

- 이승훈 - 비오는 거리


정태춘·박은옥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들어보긴 했지만 흘러가듯 들어온 노래라 무슨 이야기인지 내용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김시덕 교수가 쓴 ‘서울 선언’을 읽다 보면 종로와 광화문 이야기를 할 때 김시덕 교수가 90년대 초반 종로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고 평가한다. 정태춘은 이렇게 노래한다.


>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 비는 내리고

> 장마지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 높은 빌딩 유리창에

> 신호등에 멈춰 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그 시절 종로와 지근거리에서 살던 나는 그 시절 종로에 자주 갔었고 이 가사는 내 기억 속에 각인돼 있던 92년 당시의 장마철의 종로 거리를 바로 생각나게 한다. 그 시절 장마철의 축축한 느낌과 함께,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웬디스 앞을 오가는 사람들, 종로 극장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이 노래를 들어보면 마치 하늘에서 노래가 내리는 듯 비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92년 그 시절에 정태춘은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정태춘의 그런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도시의 비 오는 풍경과 개인적인 기억을 담아내는 노래로,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이 곡은 한때 광고 음악으로 쓰이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광고와 함께 잊혀진 예전 친구를 떠올리며 종로와 광화문 거리를 정처 없이 걷던 느낌이 강하게 연상된다. ‘비오는 거리’는 비 내리는 도시의 쓸쓸하면서도 낭만적인 분위기를 음악으로 포착하며, 차가운 빗방울이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소리, 젖은 아스팔트의 반사, 그리고 그 속을 걷는 사람의 고독한 발걸음까지 아련한 선율로 그려내는 듯하다. 이는 단순한 멜로디를 넘어, 비 오는 도시의 구체적인 ‘질감’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추억을 전달하는 곡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비의 질감’을 가장 잘 살린 곡들을 꼽자면, 이은미가 리메이크한 신중현의 ‘봄비’와 Uriah Heep의 ‘Rain’이다.


이은미의 ‘봄비’는 4월 초에 내리는 봄비의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질감을 탁월하게 담아냈다. 원곡의 거친 매력도 있지만, 이은미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깊이 있는 보컬은 마치 투명한 빗방울 하나하나가 스며들고 안개가 자욱하게 깔리는 듯한 봄날의 풍경을 귀로 경험하게 해 준다. 비의 ‘질감’을 표현하는 관점에서 볼 때, 이은미의 버전은 원곡을 훨씬 뛰어넘는다고 생각한다. 이 곡을 듣고 있으면 4월 초 어느 빌딩에서 창에 비가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며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Uriah Heep의 ‘Rain’은 “It’s raining outside but that’s not unusual”이라는 첫 구절부터 담담하게 일상적인 비를 언급하지만, 웅장하고 비장한 멜로디는 비가 주는 우울함과 상실감을 압도적으로 표현하며, 차가운 빗방울이 내면 깊이 스며들어 모든 것을 적시는 듯한 축축하고 비극적인 비의 질감을 선사한다. 11월 중하순 쌀쌀한 비바람에 나뒹구는 낙엽이 쌓인 태평로 거리를 걸을 때, 이 곡이 가진 깊고 무거운 정서가 그 순간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고 느낀다.


반면, Guns N’ Roses의 ‘November Rain’이나 X Japan의 ‘Endless Rain’은 내가 생각하는 ‘비의 질감’을 표현하는 노래와는 결이 다르다. ‘November Rain’은 제목에 비가 들어가지만,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오페라처럼 웅장하게 풀어내는 서사적인 곡이지, 비 자체의 물리적인 감각이나 질감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곡은 아니다.


X Japan의 ‘Endless Rain’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곡에서 ‘비’는 물리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끝없이 내리는 슬픔과 눈물, 그리고 고통을 상징하는 메타포에 가깝다. 감정의 폭발과 내면의 아픔을 노래할 뿐, 빗방울 하나하나의 촉각이나 비가 만들어내는 공간의 질감을 담아내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은 앞선 곡들과는 또 다른 결의 비를 보여준다. 멜로디와 가사에서 느껴지는 레트로한 감성과 어딘가 쓸쓸하지만 정감 가는 가을비의 정취는 한국적인 비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우산 속에서 마주하는 가을비는 단순히 내리는 비가 아니라, 지나간 인연에 대한 아련함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매개체가 되며, 이 또한 비가 가진 특별한 감각적 질감을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비를 주제로 한 노래들은 단순히 날씨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 각 시대와 문화, 그리고 창작자의 개인적인 감정이 겹겹이 쌓여 다양한 비의 질감과 의미를 표현하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비는 때로는 슬픔과 상실의 눈물이 되고, 때로는 희망을 찾으려는 시대의 목소리가 되며, 또 어떤 때는 아련한 추억의 필터가 되어 우리 마음속에 끊임없이 내리고 있다.


일주일 내내 비가 이어진다는 예보 속에서, 이 노래들과 함께 저마다의 비가 가진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특히 그 시절 종로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지금, 비가 살짝 그친 오늘은 다시 한번 종로 2가를 걸어보며 92년 장마의 그 축축한 질감을 몸으로 느껴보고 싶다. 그때의 비와 지금의 비가 어떻게 다른지, 아니면 여전히 같은 비의 질감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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