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후 달라진 것
[13주] 노술남녀(feat.루미큐브)
임신을 하고 느끼는 가장 큰 변화는 같이 있는 시간의 증가이다. 절대적인 시간도 늘었지만 (외부 약속의 감소) 체감상 더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알코올의 부재 때문이다. 2년 연애와 1년 신혼을 거치며 우리 부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늘 알코올과 함께 취해 있었다. 약 5년을 이어오던 친구 사이가 취중진담 덕택에 연인이 되었고, 프러포즈도 해외까지 나가서 술 먹던 와중에 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결혼 후에도 냉장고에는 늘 맥주가 가득했고, 일주일에 두세 번은 보쌈, 회, 치킨 따위의 안주류를 먹으러 다니거나 아예 집에다 술상을 차렸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금주 선고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덤으로 27시간 같은 24시간을 갖게 되었다. 주말이 너무 짧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겐 금주를 조심스레 권해 본다. 술을 먹으면 확실히 시간이 빨리 간다. 안주를 준비하는 시간 + 알코올로 내가 아닌 시간 + 평소보다 일찍 그리고 길어진 취침 시간 + 다음 날 숙취로 몸져누운 시간을 합하면 어떨 땐 반나절 이상이 되기도 한다. 그런 시간의 묘약 없이 단 둘이 보내는 주말은 맨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날엔 날이 추워 어디 나가기가 힘드니(feat. 미세먼지) 대부분의 주말은 TV를 보거나 각자 핸드폰을 하며 무료하게 보내기 일쑤다. 케이블도, 넷플릭스도 드디어 소재가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바야흐로 루미큐브의 타이밍이다. 그나마 능동적으로 머리를 쓰는 시간이다. 집에서 좀처럼 중추신경 위로 쓸 일이 없는 신혼부부 특히 예비 부모에게 루미큐브란 일종의 재활 치료에 버금간다고 해도 무방하다. 서로의 성격을 가감 없이 공유할 수 있는 좋은 경험이다.
루미큐브도 제 역할을 다하게 되면 그땐 방법이 없다. 외출할 채비를 해야 한다. 미세먼지 지수가 85로 나쁨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쁘다고 판단했다. 아내를 꽁꽁 싸매어 차에 태웠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도 태교에 좋다고 하니 데이트도 할 겸 겸사겸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향했다. '인간, 물질 그리고 변형 - 핀란드 디자인 10,000년'이라는 전시를 봤다. 화려한 회화나 조형물들을 기대하고 갔었는데 생각보다 유물 위주의 작은 전시였다.(그래서 박물관에서 한 거구나!) 오로라 영상도 신기했지만 1970년대에 핀란드는 이미 주 40시간 근무제가 확립됐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주 40시간이 되면 이 세상에서 야근과 회식이라는 단어가 사라질 것만 같다. 그때가 되면 루미큐브가 아니라 부루마블, 젠가 등도 사야 할 게다.
전시를 보고는 오랜만에 연애 때 먹었던 수제 버거와 감자튀김을 먹었다. 맛있다고 몇 번을 말하는 아내를 보고 있자니 그간 너무 집밥만 먹였나 싶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영양소를 고루 챙긴다는 명분으로 내가 만든 반찬들을 너무 강요했던 게 아닌가 싶다.(짜다고 짜다고...) 입덧과 함께 먹덧이 끝난 아내는 갑자기 입맛을 잃었다. 그렇게 샘솟던 음식에 대한 한이 어떻게 눈 녹듯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지 신기하다. 차라리 먹덧일 때는 열심히 사다 나르기만 하면 됐는데 입맛이 없다니 오히려 남편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답답하다. 출산은 한 사람이 하더라도 5개월은 아내가 5개월은 내가 품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빠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엄마가 될 수는 없으니 나는 그저 겸손한 남편이나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