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다고 좀 해줘"

[15주] 웍을 든 남편

by 제이선

아내보다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 씩 빠른 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늘 아내보다 일찍 집에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저녁은 자연스레 내가 준비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녁뿐만 아니라 다른 끼니도 내가 챙기게 되었다. 사실 12년 만에 자취생의 삶을 정리하고 신혼집을 알아볼 때 가장 중요하게 따졌던 공간도 부엌이었고, 바르셀로나까지 신혼여행을 가서 기념이랍시고 사 온 것도 앞치마와 그릇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내는 요리보단 청소에 더 재능을 보였고, 서로 간의 힘겨루기 없이 부엌은 내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가졌다고 늘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미역국, 계란국, 떡국, 어묵국, 비빔밥, 볶음밥, 오므라이스, 파스타, 떡볶이, 순대볶음, 그리고 카레까지 매일 새로운 음식을 해내기란 쉽지 않았다.(아내는 두 끼 연속 같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게다가 신혼 생활이 1년이 넘어가니 점점 괘씸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퇴근하고 돌아와 옷도 안 벗고 1시간을 꼬박 굽고, 볶고, 끓이면 느지막이 아내가 회사에서 돌아온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배가 고파 숨넘어가는 아내(+15주 차 새끼곰) 입에 밥을 넣어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밥을 다 해도 문제이다. 백종원의 평을 기다리는 골목식당 소상인처럼 나는 흘깃흘깃 아내의 눈치를 본다. 아내는 원래도 식탐이 많은 편인 데다 입맛이 까다롭고, 무엇보다 소식가이다.(룸메이트로 가장 나쁜 3가지 요소) 그녀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 자동반사로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은 킁킁대며 냄새를 맡으며 경계를 하거나 미간을 찌푸리기 일쑤이다.

♧ 카레는 신혼 부부에게 일용할 양식이다.(feat. 김재우)

어제는 얼굴만 구길 뿐 가타부타 말이 없다가 물을 한 사발 들이켜더니 "아~ 물맛 좋다!"라고 하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눌려있던 용수철이 잠금장치를 풀고 팅! 하고 튕겨져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다 먹고 고독하게 설거지를 했다. 분위기가 차갑게 식은 것을 눈치챘는지 아내는 웬일로 TV를 켜지 않았다. 인간의 생존본능이란 결코 퇴화되지 않는가 보다. 설거지를 끝내자 아내는 15주 들어 급격히 통통해진 배를 내밀며 다가왔다. 그녀는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을 알았다. 나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조용히 말했다.

"맛있다고 좀 해줘"


아내는 고맙게도 앞으로 그러겠다고 했다. 물론 남편 혹은 아내가 만든 음식이 늘 맛있을 수는 없다.(만약 그렇다면 요식업을 고려해보심이...) 그러나 밥상머리에서 지나치게 솔직해질 필요 또한 없다. 맛있다는 표현은 고맙다는 말의 다른 버전일 뿐이다. 누가 요리를 하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만들면서 즐거운 사람이 하면 그만이다. 다만 부부간에 꼭 지켜야 할 한 가지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요리든, 빨래든, 청소든 마찬가지이다.

♧ 백종원, 김수미 쓰앵님 덕분에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한 끼를 채울 수 있게 되었다.

음식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난 음식으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이 많지 않다.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셨고, 특별히 요리에 흥미를 두지 않으셨다.(대신 드라마에 흥미를 두셨다.) 그래서 반찬은 늘 그 나물에 그 나물이었다. 급식을 하기 전까지 도시락을 싸서 다녔는데 콩자반, 우엉조림, 연근조림 세 세트가 돌아가며 도시락을 수놓는 통에 나중에는 반찬 통의 검은 물이 빠지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내가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는 사실을 엄마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은 나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들 모두가 겪는 공통의 고행이었다. 심지어 아버지는 가능하면 나를 전라도 며느리에게 장가보내고 싶어 하셨다. 너라도 맛있는 삶을 살라며... (아내는 나와 같은 경상도 사람이다.)


살갑지 않은 아버지였지만 그래도 아버지가 부엌에서 뭔가를 만드실 때면 설레곤 했었다. 아버지는 가끔 술안주로 돼지고기와 설탕을 아낌없이 넣은 요리를 할 때가 있었는데 어릴 땐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 요새도 가끔 아버지가 비슷한 음식을 만들 때가 있지만 이제는 세상에 먹을 것이 많아졌기 때문인지 젓가락이 쉽게 가질 않는다. 저녁을 먹고 여지없이 곯아떨어진 아내를 보며 문득 아들의 입맛을 걱정하던 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뱃속의 내 아이도 나와 비슷한 삶을 살겠구나 하는 생각에 애잔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아버지처럼 아이에게 요리를 해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레기도 한다.(물론 그 길이 쉽지 않음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부디 입맛이 까다롭지 않은 아이로 태어나줬으면....

P.S.> 요 며칠 내가 쓴 브런치 글을 보며 아내는 '허니 보이 인척 하는 솔트 보이'라고 평하였다. 허니면 어떻고 솔트면 어떠랴. 우리 세 가족 맛있게만 살 수 있다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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