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공모전 덕분에 또 다른 나를 찾았다

다시 한번,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by 제이선

브런치 공모전 3차 주제는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이었다. 육아에 허덕이다 마감날이 되어서야 책상 앞에 앉았다.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머리를 쥐어짜도 나다운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무급 휴직 중인 회사원이 나다운 나일까? 집에서 애 보는 아빠가 나다운 나일까? 우울한 생각만 하다 보니 어스름이 짙어졌다. 저녁을 차리고 아이를 씻기고 나니 정말 밤늦은 시간이 되었다. 부랴부랴 이전에 썼던 글을 뒤졌다. 그중에서 그나마 나다운 글감을 다듬어 마감시간에 아슬아슬하게 제출했다. 속 시원할 줄 알았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무거웠다. 거짓으로 쓰진 않았지만 내 진심을 완전히 담지 못한 것 같아 새벽녘에 수차례 이불킥을 했다.

어차피 안 될 글이라 생각하고 며칠을 평소처럼 보냈다. 언제나처럼 아이 분유를 먹이고, 트림시키고, 재우기 위해 용을 쓰고, 씻기고, 중간중간 밥 차리고 설거지를 했다. 그러다 짬이 생겨 그간 찍어둔 아이 사진을 정리할 겸 외장하드를 열었다. 여행지 이름이 붙은 폴더가 와르르 쏟아졌다. 태국, 일본, 중국, 호주, 인도, 서유럽, 동유럽, 대만, 싱가포르, 홍콩, 스페인... 폴더 하나를 열자 스무 살 무렵의 앳된 내가 사진 속에서 웃음 짓는다. 또 다른 폴더를 열자 연애 시절 풋풋한 아내가 동남아 음식을 앞에 두고 행복한 미소를 띤다.

스무 살 첫 여행을 시작으로 방학 때마다 배낭여행을 떠났고, 무작정 떠나는 게 좋아 항공사에 입사했다. 입사 후에는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을 때면 주말에 훌쩍 제주고, 일본이고 가까운 곳으로 떠나곤 했다. 그때 내겐 여행이 일상보다 가볍고 쉬웠다. 정말이지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살았다. 그 기억은 전설처럼 사진 속에 잠들어 있었다.

한창 여행에 빠져있을 때 만든 블로그 : 여행의 목적, 여행을 생활처럼 생활을 여행처럼

배낭을 메고 여행길에 나서면, 내 몸 안에 스위치가 OFF에서 ON으로 켜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일상 모드에서 여행 모드로 변환이 되면 나는 굶주린 사냥꾼이 된다. 카메라를 항상 손에 들고 조금이라도 인상적인 장면이 눈에 띄면 찰나를 놓치지 않고 셔터를 누른다. 마치 사냥감에게 화살을 쏘듯이. 평소엔 동네에서도 간혹 길을 잃는 심각한 길치지만, 여행 중에는 새로운 길도 만들어서 목적지에 도착하고 만다.

내가 여행에서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여행지에 막 도착했을 때와 귀국 편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다. 낯선 곳에 떨어졌을 때 느끼는 긴장감과 막막함이 아드레날린을 자극해서 좋긴 하지만, 여행지에서 돌아올 때 느끼는 포근함과 안락함 또한 좋았다. 여행지에서의 내가 더 나다운지, 일상에서의 내가 더 나다운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다만 여행을 떠났을 때 나에게 집중하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내가 원하고 내가 바라는 대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아마 지금, 여행이 그리운 이유도 그런 자유로움이 그리운 까닭일 게다.

내 생의 첫 해외 여행은 방콕이었다.

언제든 떠날 수 있을 것만 같던 여행이 처음으로 나를 떠날 즈음 나는 아빠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노선별로 운항 정지 통보서가 쏟아지듯 올라왔고, 결국 한 달에 반은 일하고 반은 쉬는 생활이 일상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아이는 엄마 뱃속에서 쉼 없이 자라 고라니 울음을 내며 우리에게 왔다. 이제는 코로나가 끝나도 당분간은 아이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남들은 떠나고 나만 못 가는 신세가 되었다면 달랐을까? 배는 아팠겠지만 그래도 신세타령이라도 하면서 지난 여행들을 그리워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여행을 잊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이라기엔 너무 슬펐고 육아 때문이라기엔 너무 미안했으므로.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고, 또 누군가 잘못해서 지금의 상황이 된 것도 아니니까. 언젠가는 떠날 수 있겠지, 언젠가는 예전처럼 바쁘게 일할 수 있겠지 매일같이 기도할 뿐이다.


의도치 않게 랜선 여행을 하고 나니 브런치 글을 쓰며 느꼈던 찝찝함이 조금은 개운해졌다. 잊고 살던 또 다른 나를 만난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언제든 떠날 수 있고 또 돌아올 수 있는 자유로운 내가 진정한 나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감하다. 지금의 나는 안팎으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럼 계속해서 나 아닌 나로 살아야 한단 말인가? 그럴 수는 없다. 여행을 생활처럼 살 수는 없지만, 생활을 여행처럼 살 수는 없을까? 고민 끝에 나는 기도문을 외는 심정으로 여행 사진을 갈무리하기로 했다. 유튜브를 보며 동영상 편집을 배워 여행지별로 여행 영상을 제작할 생각이다. 모든 폴더의 사진이 다 정리될 때 즈음엔 다시 자유롭게 떠날 수 있으리라. 하루빨리 아이에게 가장 행복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지난 가을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떠난 통영부터 영상을 만들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일기의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