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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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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Dec 28. 2020

어제는 예쁘고, 오늘은 밉다

[164일 쓰고, 175일 고치다] 뒤집기 지옥과 이유식 코스 요리

[164일] 며칠 전 아이는 처음으로 우리에게 뒤집는 모습을 보여주었다.(Yeah!) 발달이 느린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기우일 뿐이었다. 처음 목격하는 아이의 뒤집기는 마치 올림픽 레슬링 경기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였다. 그 후로 몇 번 더 궁둥이를 들썩들썩하더니 어제는 스스로 팔까지 빼내며 뒤집기 퀘스트를 완벽하게 마스터하였다. 선배들 말로는 한번 뒤집기를 하면 계속 뒤집는 통에 부모가 바빠진다는데 아이는 가끔 돌아보면 얼굴을 쑥 들고 쳐다보고 있을 때가 있지만 다른 집 아이처럼 시도 때도 없이 뒤집지는 않는 듯하다. 확실히 흥미가 오래가지 못하는 아이라는 걸 다시 한번 느낀다.


[175일] 뒤집기 지옥이다.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몸을 뒤집는다. 잘 밤에도 몇 번씩 몸을 뒤집고 낑낑대는 통에 아내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내 주파수와는 맞지 않는 모양인지 다행히 나는 숙면 중이다.) 눕히고 돌아서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쳐다보는 아이가 새끼 사자처럼 느껴져 귀엽기도 하다. 오히려 누워있는 것보다 엎드려 있을 때 더 안정된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엎드려 있으면 발 망치가 심해져 아랫집 눈치가 보인다. 아들이 발을 굴릴 때면 이삿날 보았던 아랫집 아주머니의 쪽 찢어진 눈매가 생각나 황급히 매트 위로 아이를 옮기곤 한다.

그의 첫 번째 뒤집기 한 판. 이때까지만 해도 그 한 판이 계란 한 판이 될 줄은 몰랐다.

[164일] 뒤집기를 시작한 즈음 이유식도 시작했다. 형수님이 물려주신 이유식 책을 호기롭게 펼쳐 들고 이유식 만들기에 돌입했으나 가장 처음 당황했던 것은 쌀가루였다. 불린 쌀을 갈면 된다고 아주 쉽게 써놨는데 믹서기에 한 숟갈의 쌀을 넣고 돌리니 돌아갈 턱이 있나. 믹서기를 들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어렵사리 간 쌀로 첫 미음을 만들었을 때의 성취감은 말해 무엇하리. 처음에는 저 조그마한 놈이 내가 만든 미음을 먹어줄까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다 잘 받아먹을 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이어서 애호박, 감자 등을 넣으며 매번 새로운 퀘스트에 도전한다. 한 날은 부부싸움을 한 까닭에 아내가 이유식에 도전했다.(우리 집 공식 부엌데기인 나는 화가 나면 폐업을 하곤 한다.) 약 한 시간 가량을 믹서기와 싸우고, 냄비와 싸운 끝에 연금술사가 구리를 얻듯 아주 소량의 미음을 구해낸 그녀는 곧바로 쌀가루를 주문했다. 그리고 쌀가루는 신세계였다. 연금술이 따로 있지 않았다.


[175일] 쌀미음 - 애호박 미음 - 오이 미음 - 감자 미음 - 고구마 미음 - 브로콜리 미음 - 청경채 미음 순으로 아들을 대접(?)하고 있다. 요즘은 아들이 나보다 더 잘 먹고사는 것도 같다. 이유식이라는 게 10g 단위로 워낙 소량으로 들어가다 보니 처음에는 소꿉놀이하듯 신나기도 했는데 이제는 코스 요리를 내는 주방장처럼 일의 일부로 느껴진다. 대부분의 엄마처럼 아내도 계량에 민감해서 이유식을 준비하는 게 더 조심스럽다. 나를 키운 엄마와 할머니의 성정을 잘 알고 있는데 도대체 나 어릴 때는 어떻게 해서 먹인 거지?!

잘 먹어 좋긴 하다만, 인간적으로 하루에 두 번 응가는 예의가 아니야 아들아.

[164일] 아내가 장난감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아내는 본인의 쇼핑 욕구를 아이에게 투사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장난감 쇼핑에 몰두한다. 늘 핸드폰을 보고 있길래 뭐 하는지 옆에서 쓰윽 보면 색색깔의 장난감 이미지다. 최근에는 방방 뛰는 놀이기구를 사 왔는데 방에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사이즈가 커 현재 거실과 부엌 그리고 안방 사이에서 묘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다. 당근마켓 등의 중고 물품 판매 플랫폼이 생활을 윤택하게 하긴 하지만 엄마들에게 불필요한 위로와 합리화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부작용이 있다.


[175일] 안 샀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소름이 끼친다. 약 6개월가량 지켜본 결과 아이의 호기심은 얕고 잦다. 새로운 장난감이 없었다면, 특히 몸을 쓰는 장난감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밥을 먹고살았을까? 육아는 템빨이라는 말을 누가 만들었는지 깊은 통찰에 박수를 보낸다. 사고, 또 팔면 되지 뭐 그 까이꺼.

이게 학교 다닐 때 배운 필요악이란 거구나.

[164일] 아이가 태어나고 지금이 가장 예쁘다. 잘 웃고, 잘 울고, 잘 논다. 그 큰 눈으로 가만히 나를 관찰할 때나, 이른 아침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을 때 씨익하고 웃는 모습을 보면 가끔 심장이 찌릿할 만큼 사랑스럽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아이를 보며 이제는 이 조그마한 녀석에게 위로받고 있음을 인정한다. 먼 훗날 사춘기 소년이 된 아이가 재수 없게 굴거나 아버지 알기를 뭐 같이 아는 나이가 되면 그때는 지금을 꼭 기억해야겠다.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때가 있었노라고.


[175일] 어젯밤 잠들지 않고 우는 아이를 안고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도록 흔들어댔더니 아이가 나를 보면 웃지 않고 멀뚱히 쳐다만 본다. 내 품에서는 울고, 아내 품에서는 씨익 웃으며 나를 쳐다보는데 뭔가 굴욕적이다. 三寒四溫도 아니고 삼일 예쁘고 사일은 밉다.  계절이 빨리 지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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