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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Jan 13. 2021

그랜드 피아노 같은 아이

[191일] 차라리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지

 장류진 작가의 『도움의 손길』이라는 단편 소설에 이런 표현이 있다.

'나에게 아이는 마치 그랜드 피아노와 같은 것이었다.'


주인공은 딩크족 새댁인데 그녀의 생각은 이렇다.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랜드 피아노를 놓기 전에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 고려해야 한다. 또 욱여넣고 살면 살 수는 있으나 결국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처럼 살게 된다.  


우선 아이를 악기에 비유한 건 무척 공감한다. 비단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악기가 보관과 관리가 중요하고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줄이 끊어지거나 소리가 탁해지기 마련이다. 아이 역시 그렇다. 한 시라도 한 눈을 팔면 사고를 치거나 울부짖는 게 그들이니까. 그렇다고 한 눈을 팔지 않으면 무탈한가? 그렇지도 않다. 아이는 늘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틀어진다.


 이사를 하느라 처가에 며칠 아이를 맡겼다. 데려온 다음 날부터 아이가 물에 몸이 닿기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었다. 덕분에 오랜만에 아이를 씻기며 땀으로 목욕을 다. 손이 바뀌어서 그럴 수도 있고, 물 온도가 너무 높아서, 목욕 순서가 달라서 등등 우리는 눈치채지 못한 수많은 디테일들이 그를 자극했을 수 있다. 마치 조리원에서 아이를 데려 와 처음 내 손으로 씻길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6개월 만에 다시 원점이라니. 맥이 빠졌다. 마치 기타 코드부터 다시 배우는 기분. 몇 번의 지옥을 경험하고 낮은 자세로 유튜브를 보며 다시 배웠다.

  

알아듣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과 볼에 물을 묻혀주며 '이제부터 씻을 거예요.' 예고한다.

온도계도 하나 사서 물 온도를 37도로 정확하게 맞춘다.  

씻는 속도를 기존의 0.5배속으로 늦추고 아이의 눈빛, 입모양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떨리는 손으로 씻긴다.  

혹시 추워서 그러나 싶어 윗옷은 입히고 아랫도리만 벗긴 채로 물에 담가 순서대로 옷을 벗긴다.  


그렇게 몇 번, 아이가 다시 예전처럼 욕조에 앉아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다. 6개월 아이가 이토록 섬세하다니! 아내는 내가 친절하게 대해줘서 아이가 다시 웃는 거라 말했다. 다른 핑계를 대긴 했지만, 나도 모르는 새 아이 씻기는 게 손에 익어 잡일 하듯 해치워버렸던 것은 아닌지 속이 뜨끔했다. 기억해 보면 나 또한 어렸을 때 목욕탕 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는데,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물을 퍼붓는 통에 씻는 내내 숨을 참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틀에 한 번 씻기는 것조차 감정을 담아야 한다니 웬만한 악기보다 아이가 다루기 어려운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 그랜드 피아노 같은 아이는 없다.

우선 그랜드 피아노는 밥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아이는 3시간 간격으로 밥 달라고 호소한다.  

피아노는 움직이지 않지만 아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피아노는 내가 건드리지 않으면 얌전하지만 아이는 내가 건들거나 말거나 포효한다.  


주저리주저리 쓰긴 했지만 요는, 피아노는 물건이지만 아이는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랜드 피아노처럼 아이를 위한 공간은 당연히 필요하다. 쉴 새 없이 뒤집고, 또 최근 들어 되집기까지 시전 하는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넓은 플레이 그라운드를 마련해주고 싶은 아비의 마음은 다른 부모와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그랜드 피아노를 놓기 전에 생각을 했어야지 하는 소설 주인공에게 솔직한 심정으로 빼애액!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다.


그러나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해보면 대체 얼마큼 커야 아이를 들이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겐 단칸방도 충분할 수 있고, 반대로 어떤 이에겐 40평대 아파트도 부족할 수 있다. 국민 MC 유재석님도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다가 아이 장난감을 밟고 넘어질 뻔했다고 한다. 이처럼 공간이 크건 작건 부모와 아이는 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나 보다. 그리고 그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인 공간만을 뜻하지 않을 게다.


아이를 아직 갖지 않은 신혼 애송이들에게 한 마디 하자면, 물리적인 집의 크기보단 내 공간을 내어주고 같이 섞여 살아갈 만큼 내 마음에 여유 공간이 있는지부터 먼저 점검해 보기를.


그랜드 피아노가 맘껏 발망치 부릴 바닥을 만드는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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