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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비일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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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선 Dec 10. 2020

대기만성형 아이

[157일] 뒤집기 한판은 없었다

 이사를 하는 동안 잠시 처가에 아이를 맡겼다. 처음으로 남의 손에 아이를 장시간 맡기는 터라 걱정도 됐지만 이참에 잠시 육아에서 벗어나고픈 욕심도 있었다. 우려와 달리 며칠 뒤 장모님은 아이가 뒤집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다. 여느 부모처럼 아이의 발달 과정을 한 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던 우리는 아쉬움과 반가운 마음이 교차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삿짐을 정리하고 아이를 새 집으로 데려온 지 일주일이 넘었지만 아이가 좀처럼 뒤집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생후 5개월이면 보통 뒤집는다는데 만 5개월 하고도 한 주가 지났음에도 옆으로 돌아 눕기만 할 뿐 뒤집을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퇴화한 모양인지 눕히기 무섭게 울부짖는다. 이제는 뒤집기를 했다는 장모님의 말이 전설처럼 느껴질 정도다.

뒤집기 못해서 발로 용서를 비는 거니?


 이 놈이 왜 이럴까 하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종국엔 집이 작아 그런 건 아닌지 자격지심까지 생겼다. 사실 우리는 신혼집보다 1억을 더 주고, 더 멀리,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왔다. 신혼집에 맞춰 산 가구들은 전부 한 덩치씩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짐을 줄여야 했다. 이삿짐을 준비하며 아내는 별안간 집 없는 서러움과 걱정을 쏟아냈다. 주위 친구들은 모두 집이 있는데 자신만 청천벽력 같은 정부 정책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꼴이 짜증 난다며 한동안 울상이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쪼그마한 아들놈도 집이 작아 뒤집다 다칠까 봐 망설이나 싶어 가슴 언저리가 뻐근하게 조여왔다.

2년 동안 매일 욕하던 집이라도 막상 헤어질 땐 아쉬운 게 사람이더라. 미우나 고우나 신혼집은 잊기 힘들 것 같다.


 이사를 끝내고 오랜만에 출근한 날, 아내의 톡을 받았다. 아내가 보낸 동영상 속 아이는 어제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장난감을  잡고 흔들며 발랄하게 놀고 있었다. 이제는 손목에 힘이 생겨 잡고 흔드는 놀이가 가능한 모양이다. 동영상을 보고 안심이 됐다. 아이는 느리지만 분명히 나아가고 있다. 

아내에겐 굳이 말하지 않았지만 나 또한 어릴 때 성장이 느렸다. 말도 늦고, 글도 늦게 배우고, 머리도 또래보다 많이 늦게 트여 엄마가 걱정이 많았다. 얼마나 걱정을 했으면 당시 철학관을 하고 있던 이모부에게 내 사주팔자를 물었겠는가. 그때 이모부는 엄마에게 아들이 대기만성형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한 마디만 남겼다고 한다. 엄마는 그 한 마디만 믿고 주변의 사람들의 수군거림에도 꿋꿋하게  날 키웠다. 시간이 흘러 아들 결혼식날 엄마는 본인이 옳았음을 확신하고 그제야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모부가 실제로 용했는지, 그냥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정작 본인의 앞날은 몰랐는지 얼마 전 이모부 내외는 갈라섰다.) 엄마의 믿음이 결국 나를 키운 택이다.

오뚝이라고 아내가 신나서 주문한 장난감. 그러나 녀석은 이름과 달리 제대로 서질 못 한다. 어쩜 장난감도 나같은지...


 지난 삶을 돌이켜보니 남들보다 뒤처진다며 좌절했던 기억이 꽤 여러 번 있다. 첫 수능에 실패했을 때, 강원도 최전방에서 보초설 때, 머나먼 타지에서 그릇을 닦을 때 등등 나 혼자만 이 세상을 후진으로 역주행하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러나 삼십 몇 년 살아 보니 한 두해 정도는 사실 티도 나지 않았다.(최근 2년 말고) 그렇게 생각하면 아이가 고작 한 두 달 발달이 늦다고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이 우습다.

꽃마다 피는 때가 따로 있고, 음식도 제철이 제각각 다른데 사람이라고 다 같을까?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빨라지는 요지경 같은 세상이다. 부모인 내가 중심을 잡고 기다려줘야 아이가 제 속도로 자랄 수 있을 테다. 아이도 아빠를 닮아 대기만성형이라고 나는 그렇게 굳게 믿고 싶다. 30여 년 전 내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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