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나먼 고향

졌잘싸! 설 기차표 예매

by 제이선

아침 7시를 조금 남긴 시각. 비구름 덕에 아직 어스름이 짙게 깔렸고, 고요한데 빗소리만 타닥거렸다. 깜깜한 거실에서 노트북 모니터를 켜고 코레일 사이트에 접속했다. 하얀 불빛 아래 이제 곧 소리 없는 경주가 시작되려 했다. 전자시계가 06:59에서 07:00으로 넘어가자 그 숫자를 짐작할 수 없는 양의 선수들이 저마다 호흡을 멈추고 기도하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윽고 심장이 한번 뛸 정도의 시간을 두고 나와 1만 6천 여명의 순위가 전광판에 띄워졌다. 짧디 짧은 한 판이었다. 숫자는 더디게 차감하고 그에 맞춰 사물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났다. 나는 아직 잠들어 있는 아내가 깰까 봐 숨을 죽이며 출근 준비를 하고 다시금 모니터 앞에 앉았다.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초조하고, 설레고, 또 한편으로는 지루하다. 더군다나 누군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반대로 기다리는 일은 물어 무엇하랴.


결국 40분 여를 기다려 '매진'이라는 빨간딱지를 보고야 말았다. 고향을 떠나올 때도 힘들었지만 다시 고향을 찾는 일 또한 우리에겐 쉽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건만 열차표를 구하지 못하면 괜스레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고향을 등지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은 지 어느덧 14년. 매년 두 번씩 꼬박꼬박 겪는 진통이다. 철도 씹어먹을 때는 무궁화 4호차 열차카페에서 부대끼며 가기도 하고, 메뚜기처럼 빈자리를 앉았다 서기를 반복하기도 했다.(Latte is horse) 서울에서 사귄 친구들에게 그런 무용담을 들려주면 무척 신기해하며 고향이 있는 우리를 부러워하는 양했지만 그건 그저 가진 자의 배려 같은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나도 홑몸이 아닌지라 그런 모험을 하기는 어렵고, 사실 홑몸이라도 피하고만 싶다. 다행히 우리에겐 아직 패자부활전이 남아 있다. 전날 혹은 당일에 떨어지는 취소 티켓을 잡으러 나는 또 수없이 클릭을 하게 될 것이다. 운이 좋으면 기차에서 창밖을 보며 감상에 젖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허벅지를 찌르며 차를 몰고 가게 될 게다. 그래도 이런 진풍경이 오래 가진 않을 것 같다. 요즘 후배들이 '비둘기'나 '통일'같은 낭만적인 열차 이름을 알지 못하듯 내 아이가 혼자서 기차표를 끊을 때 즈음엔 '민족 대이동'이라는 말도 옛말이 되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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