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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Nov 21. 2021

거꾸로 가는 시계

옛날 가족사진을 보면서

나는 기억력이 좋 편이다. 자주 되짚어보는 습글을 적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다만 과거를 들여다볼수록 쓸데없는 생각들이 피어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망각 축복이라는 것을 느낀다. 모든 허물과 실수를 기억하며 견딜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지금이야 과거에 겪었던 일들이 유치하고 쉬워 보이지만 그 당시에는 전부였던 것처럼, 그 나이에 맞는 아픔과 어려움이 있다. 부모와 스승에게 조언을 받더라도 모두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불을 끄고 어두워진 방은 처음에 아무것도 보이지 지만, 조금 지나면 흐릿한 윤곽이 드러난다. 기억도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 옅어지고 희미해질지라도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렸을 때 함께 했던 친구의 버릇이 몸에 배어있기도 하고, 회사를 떠난 상사의 말투를 어느새 따라 하고 있기도 한다. 명확히 구분이 되지 않을 뿐, 내 안 깊숙이 일부분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올해 친할머니의 장례식을 보면서 얼마나 내가 가족의 기억 속에서 자라왔는지 느꼈다.

곧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음력 생신이다. 출처: Pixabay

어렸을 때 기억 속의 할머니는 엄격한 분이었다. 한 번은 허락 없이 냉장고를 열었다가 호되게 야단맞았. 중학교 때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말씀드렸을 때 1등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을 하셨던 것도 기억이 난다. 책에서 나오는 친할머니는 부모님보다 너그운 존재였는데, 오히려 나는 꾸중을 들을까 봐 인사드리러 가는 게 부담스러울 때 있었다. 할아버지도 "리더"나 "넘버원"이라고 치켜세우실 때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나는 해주신 갈비찜과 과일을 먹으면서 금방 그런 생각을 지우곤 했다.


타지 생활이 길어지면서 점점 뵐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3년 전 마지막으로 방문한 한국에서 찾은 할머니 댁은 현관문에서 들릴 정도로 TV 소리가 커져있었고, 갈비찜의 소금 간은 조금 과할 때가 있었다. 방에서 나오신 할아버지 너무 작아져있었고, 교에서는 평균 키를 살짝 웃도는 내가 이 집에서는 거인이 되어있었다. 더 이상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내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에 대해 반복하셨을 뿐이다. 눈물을 자주 보이는 당신의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다.

업무에 치이다 보면 베푸며 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잊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스럽게 다시 맞춰 살아가게 되는 듯하다.

두 분 다 1년 전부터는 조금씩  잊어버리셨던 것 같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예전보다 힘을 잃었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시기도 했다. 같은 번호로 전화를 드렸지만, 이제는 직장인이 된 나를 잊 대학 졸업 날짜를 물어보시기도 하고, 오래전 군대나 고등학교 이야기를 주로 하시기도 했다. 내 목소리가 아버지와 비슷한지, 종종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시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이름을 잊지는 않으셨고, 내가 아버지라 착각하셔도 내 이야기는 빠짐없이 하셨던 것 같다.


나는 할아버지의 흰머리를 닮았다. 아버지 흰머리가 많고, 나 또한 눈에 띄게 많아졌다. 어렸을 때는 하얗게 센 머리가 흉하다고 생각했다. 늘어나는 새치에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았는데, 이제는 내가 할아버지 손자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같아 싫지는 않다. 심심할 때 내가 악기를 잡는 것도 피아노를 전공했던 외할머니를 닮았을 것이고, 글을 쓰는 일도 책을 즐겨 읽었던 어머니를 닮아서일 것이다. 오랜 유학생활을 며 이 모두를 이야기로 전하기에는 무뎌졌지만, 확실히 내 안에 가족과의 기억을 담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뉴욕을 거닐면서 내가 좋은 기억을 선물할 수 있으면 한다.

년 전 약해진 할아버지 강하게 내 손을 잡았던 것이 기억난다. 침대에서 일어나실 힘은 없어도, 손아귀의 힘은 했다. 가족의 연이란 그런 것이다. 거꾸로 가는 시계라 한들, 지나온 길을 부정할 수 없고 공유한 기억을 없앨 수 없다. 나에게 남아있는 가족들 또한 그러하다. 언젠가는 나 느려지고 거꾸로 갈 것이다. 오래된 일 위에 새로운 일이 쓰이며, 쌓인 경험으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지만, 다시 걷지는 못한다. 그렇기에 지금을 더 감사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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