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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Dec 17. 2021

서사 속의 작은 대화

잡담에 대해 잡담을 나누며

회의를 시작하면 하나 둘 모이면서 어색함을 덜기 위해 한 마디씩 한다. 요즘 많이 추워졌네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보내셨어요 등의 말이다. 이를 미국에서는 "Small Talk"이라 하는데, 말 그대로 단한 의미가 없는 은 대화다. 요즘과 같이 영상 회의가 잦은 경우에는 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잡담을 더 많이 한다. 음소거 버튼이 켜짐과 꺼짐을 반복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얼마나 고민하는지 느껴진다. 영상이 없을 때는 의사전달 수단이 목소리밖에 없으니, 침묵이 이어질 때면 불편한 분위기가 감돈다.


얕은 깊이의 대화가 시간낭비라는 의견도 있다. 저 시간 때우기용으로 아무 말이나 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자칫하면 수다스럽고 가벼운 사람으로 비칠까봐, 재미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움을 가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식자리에서 사나 업무 이야기만 쉴 새 없이 면, 지친 주변 사람들이 조금씩 자리를 떠난다. 내가 생각하기에 잡담은 대화의 윤활제이자 더 깊은 대화를 위한 포석을 두는 작업이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배워가는 등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Small Talk를 싫어하나, 안하는 사람은 없다. 출처: A Bit Sketch

아이들은 Small Talk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화의 가능성 자체에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서 행동보다는 관찰에 능해지고, 경험으로 인한 두려움도 많아지면서, 대화에 대한 무게를 더 두려 하는 경향도 생기는 것 같다. 무의식적으로 반영되는 문화, 가치관, 관심사들이 사람마다 다르기에 다 큰 성인과 잡담을 나누는 것은 매우 어렵다. 처음에는 풍자와 반어법이 생활화되어있는 미국인들의 대화가 적응되지 않았고, 한국에서 오래 자랐던 나의 기준으로는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공항이나 먼 길을 갈 때 탄 택시 안의 정적을 깨고 인사말을 건네면 처음은 어색하다. 하지만 몇 마디 주고받다 보면, 아무리 과묵한 분이더라도 사연이 조금씩 스며져 나온다. 파키스탄에서 사업을 하다가 자식 교육을 위해 포기하고 이민 오신 분도 있고, 모로코에서 장교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운전을 시작하신 분도 있다. 20분 채 안 되는 잠깐의 인연에서 나는 지구 반대편의 소식을 듣고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낀다. 택시기사의 맛집은 진짜배기라는 말처럼 New York의 숨은 맛집을 알게 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Small Talk의 끝맺음이 명확지 않은 상황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만화다. 출처: New Yorker

대학교 3, 4학년 때 면접들로 바쁠 때 나는 대화 주제와 시나리오를 외워가기도 했다. 미리 검색한 면접관의 이력을 보고 어떤 사업에 대해 이야기할지 고심하고, 어떤 답이 나올지에 대한 계산을 했다. 나름 준비한 공식의 틀에 대화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준비된 대화는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문답이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들을 태도가 없다는 뜻도 된다. 아무리 벽을 쌓고 댐으로 막은들, 흐를 물은 결국 아래로 흐른다. 며칠을 걸려 만든 시나리오는 쓸 일이 없었다. 우리는 미식축구 이야기로 30분 가까이를 보냈고, 나는 그 직장 얻었.


아직도 기억에 남는 터널 이야기 있다. 공사 현장에 어느 기술자가 방문차 왔는데, 측량없이 양쪽에서 산을 뚫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놀란 기술자가 인부에게 눈대중 계산이 틀리면 어떻게 할 것인지 묻자, 그의 답은 "그럼 터널이 2개 생긴다"는 것이다. 물론 건설의 기초 따위는 무시한 우스갯소리지만, 대화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한다. 철저하게 계획하고 시간 더 들이는 것보다 오히려 시작부터 하는 것이 중요할 수도 있다. 상대의 어떤 부분이 흥미로운지 초면에 함부로 판단할 부분은 아니니까 말이다.

스마트폰과 같은 쉬운 도피처가 잡담을 더 어렵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Maria Scrivan

효율성만을 보고 따진다면 Small Talk은 없어져야 할 대상 1순위다. 그러나 사람은 스위치를 켜고 끄는 기계가 아니다. 철학자 MacIntyre의 말을 빌려, 인간은 서사적 존재이며 이야기하는 존재다. 대화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잠깐 바꾸더라도, 본질적인 성격과 흐름은 바꿀 수 없다. 내가 속한 가족, 친구 그리고 직장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정체성을 완성할 수 있다. 작은 대화들은 이를 달성하기 위한 끝없는 탐색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기보다는 서로를 맞추어가는 것이 더 흥미롭지 않을까. 확실치 않더라도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에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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