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규모의 사업들을 다루다 보면 재무제표나 수익성 모델의 숫자들이 바로 와닿지 않을 때가 많다. 그 정도 액수의 돈을 만져본 적도 없거니와, 회사의 자금현황은 나와는 동떨어져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현금흐름을 파악하고 통계분석을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만약 누군가가 건설구조를 묻는다면 문서에 쓰여있는 그대로를읽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컴퓨터 앞에 앉아 오랫동안 조사를 하더라도, 현장 전문가만큼의 이해를 갖기는 정말 어렵다. 엑셀에 빼곡히 채워진 숫자들도 사업에 연관된 모두의 이야기를 담아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뉴욕의 경관을 자랑하는 Brookyln Bridge는 누가 지었을까? 이 건설을 설계한 건축가일까, 자금을 댄 시장과 금융업자들일까, 아니면 직접 나르고 실었던 노동자들일까. 모두의 손을 거쳤기에 오직 누구 하나의 업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평양을 건너온 수많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노력이 담겨있고,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고, 파상풍과 잠수병을 극복하고 일구어낸 Roebling 가족의 노력 또한 한몫했다. 한 때 미국에서 가장 큰 현수교였던 이곳은 이러한 애환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내색하지 않는다. 그리고 다리 위 출퇴근으로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부가적인 옛날이야기일 뿐이다.
Brookyln Bridge 위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과 운동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일을 거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는 희미해져 간다. 역할분담이 세분화되면서 개인이 맡는 영역은 전문화되고 좁아졌기 때문이다. 아주 먼 과거에는 가내수공업으로 소수의 기술자들을 거쳐 물건이 만들어졌다면, 자동차와 컴퓨터는 수천 명의 도안과 조립을 거쳐 만들어진다. 전산화가 진행되면서 수기로 작성된 서류철들은 사라져 간다. 이제는 다양한 앱과 프로그램을 통해 계산하고 도출해내고, 몇 초 안에 원하는 것을 검색할 수 있다. 이는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결실이며, 개인이 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와 정밀함을 갖춘 결과다. 하지만 기여할 수 있는 지분이 작아지고 연결고리가 더 복잡해지면서, 임하는 일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의미 없어 보이는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 많은 사람들은 일 자체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경제학 모델에서는 흔히 임금의 영향을 계산할 때 총 이용 가능시간(T)을 노동시간(H)과 여가시간(L)으로 나누어 계산한다. 이는 재화를 벌어들이기 위한 성격의 노동을 나타내는데 용이하다. 하지만 일은 생계 수단으로써의 물질적인 성격도 있지만, 자아실현처럼 비물질적인 목적도 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1억 달러의 자산이 있다면 직장을 그만둘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내 지인들은 보통 계속할 것이라고 답한다. 정해진 근무시간과 함께 제한된 선택들이 강요되는반면에 일이 부여해주는 안정성, 소속감과 성취감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지나친 자율을 보장하는 것은 오히려 방임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적당한 직장의 울타리는 선택과 집중을 효과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그래서 경제적인 이유를 배제하고서라도 일은 필요하다.
독일 철학잡지 Hohe Luft의 편집장, Thomas Vasek의 모습이다. 출처: The European
그러나일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정말 어렵다. 내가 몸담고 있는 컨설팅을 포함해 로펌과 같은 클라이언트 서비스 회사들은 시간당 계약금을 받는다. 즉, 노동 시간을 판매하는 것이다.고객사의 요구에 따른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는 피로를 더해,결국 기력을 소진하고 흥미를 잃게 될 때도 있다.하지만이런 외적인 압박이 "Burnout"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휴가를 다녀오거나 좋은 성과에 대한 인정을 받으면 그만큼 재충전이 된다. 오히려 내가 지정한 목표와 나의 능력이 괴리가 있을 때, 직장 외의 정체성이 모호할 때, 나는 극심한 피로를 느낀다.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직장 외에 붙잡을 것이 없고, 직장은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채찍질로 더욱 괴로워진다. 승진 뒤에는 다음 인사평가를 생각한다.출구가 없어지는 것이다.
성과를 쌓고 연차에 따라 높은 지위를 쟁취하는 공식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수입보다 금융소득이 앞서는 시대가 왔고, 이제 사람들은 몇십 년 후의 안정을 약속받는 것보다 현재에 즐기고 계발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다. 늘어나는 평균 이직 횟수도 이 때문일 것이다. 예전보다 기회도 많아진 만큼, 평생직장으로 일원화된 조직의 삶을 굳이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돈을 많이 주는 일, 주위의 인정을 받는 일 등 사회통념에 부합하는 추상적인 목표들은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조급함만 더할 뿐 목적의식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일에 대한 내적 관찰을 해야 하고,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직장 외에 주변을 돌아보고 배워가는 것도 어느 정도 필요한 듯하다.
얼마 전 입주한 새 사무실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다양한 직업을 품고 있는 회사 건물들이 보인다.
일과 휴식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고, 속도와 여유 또한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사람들마다 각자 자신의 방향을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바도 다르다.80시간 이상 근무하면서 유쾌하게 임할 수도 있고, 정시퇴근을 하면서 힘겨워할 수도 있다. 갑자기 생긴 높은 수요로 가진 기술에 대한 엄청난 보상을 받는 경우도 있고, 장래가 밝은 줄 알았던 직장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기도 한다. 큰 경제의 흐름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은 나의 일과 휴식이다. 그래서 조금씩 나의 속도를 찾아가려 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유를 즐기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