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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Dec 21. 2021

단골 식당

Diner에서 아침을 먹으며

문을 열고 들어서면 분주하게 오가는 원들이 있고, 카운터 의자에 걸터앉아 신문을 읽으며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설탕 우유를 얼마나 넣었는지 모를 뿌연 커피 옆 접시에는 푸짐한 팬케이크, 노른자가 흐르는 계란 그리고 으깬 감자 요리가 담겨있다. Coffee를 "코피"에 가깝게 발음하는 Brookyln 토박이의 목소리를 들으면, 외국인이 많은 이 도시에도 터를 잡고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 있음을 다시 상기시켜준다. 가끔은 아침을 이렇게 집 주변 Diner에서 낸다.


한국에 기사식당과 백반집이 있다면 미국에는 Diner가 있다. 늦은 저녁이면 문을 닫는 식당들이 많은 미국이지만, Diner만큼은 밤낮 구분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는 저렴한 가격에 계란, 소시지, 베이컨 등을 팔고, 나머지 시간에는 햄버거나 수프 등 식사들을 제공한다. 중 새벽부터 식당은 형광색 조끼를 입은 공사장 인부들이나 출근 전 들른 양복 차림의 직장인들로 바글바글하다. 계속해서 채워지는 무거운 커피잔을 들이켜면서, 사람들은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미국의 아침식사 구성이다. 출처: Pixabay

Diner의 메뉴는 방대하다. 코로나로 인하여 QR 코드로 바뀐 곳도 있지만, 보통은 B4 용지 크기의 코팅된 메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의 분식점처럼 정말 이 음식들을 바로 만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종류가 많다. 아마 아침에 읽는 신문기사들보다 글자가 더 많지 않을까 어림짐작해본다. 나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정독하지는 않고, 대강 아침 식사와 음료를 훑은 후 주문한다. 가끔은 무엇이 또 있나  읽어보기도 하지만, 결국은 앞 페이지 Corned Beef Hash와 오렌지 주스를 시킨다. 기름진 음식 위에 뿌리는 매운 Tabasco, 그리고 같이 나오는 구운 식빵과 버터는 이 든든한 한 끼에 보탬이 된다.


처음 Diner를 찾았을 때는 짧은 영어가 자신이 없어 최대한 질문을 피하려 했다. 그래서 간단한 계란 요리를 골랐는데, 어떻게 요리해주길 원하는지 질문이 돌아왔다. 스테이크처럼 Medium Rare를 주문하고 큰 웃음을 산 적이 있다. Sunny Side Up이 해가 뜬 모습을 한 계란 프라이고, 덜 익힌 듯한 분홍색의 염장 고기가 Corned Beef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이야기다. 옛날 뱃사람들이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게 소금에 절여 만든 고기가 지금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계절과 무관하게 먹을 수 있는 장이나 젓갈과 같은 음식이라 할 수 있겠다. 값싸게 즐길 수 있는 고기인만큼, Diner에서 자주 팔리는 대중적인 음식이기도 하다.

유대인 Kosher Deli에서 먹은 푸짐한 샌드위치다. 종교적인 이유로 돼지고기를 쓰지 않고, 치즈와 같은 유제품과 육류를 같이 판매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찾는 Diner이지만 요즘은 많이 없어지는 추세다. 운영이 어려워진 기존 식당들이 문을 닫은 사이에, IHOP, Denny's 같은 대형 식당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처럼 외부 인구와 자금이 유입되면서 기존 인구가 밀려나는 현상을 Gentrification이라고 한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다가 서서히 패션을 주도하는 명품 매장들에게 자리를 내준 New York의 Soho처럼, 지역 주민들의 단골 식당은 더 유연하고 빠르게 대처하는 프랜차이즈에게 밀려난다. 투자가 늘어나고 세수가 증가하면서 잘 닦인 도로와 새 건물들이 들어서지만, 동시에 낡은 상점들도 조금씩 사라져 간다.


하지만 강한 썰물에도 쓸려가지 않고 모래밭에 남아있는 조개들처럼, 꿋꿋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식당들이 있다. California에 가면 찾는 Diner가 있는데, 그곳에는 몇십 년 동안 간직한 그곳만의 분위기가 있다. 갈 때마다 카운터에 앉아 계시는 백발의 할아버지 한 분은 커피 한잔 외에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지만, 직원 어느 누구도 재촉하지 않는다. 한쪽 다리를 저는 종업원은 벽에 걸려있는 빛바랜 사진 속의 모습 그대로 웃음을 간직하고 있다. 뜨거운 철판 위에서 감자와 소시지를 굽는 사람들이 가득한 주방은 기름 소리와 대화가 뒤섞여 시끌시끌하다. 비좁은 공간 속에 의자와 테이블도 몇 개 없지만, 줄 서서라도 먹게 되는 것은 맛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California에서 자주 찾았던 Diner의 모습이다. 출처: USA Food

노상에서 새 건물 안으로 자리 잡은 단골 식당을 방문했다가 맛이 변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추운 겨울에 오랫동안 줄을 선 후 은박지에 감싼 볶음밥을 받는 것 대신, 따뜻한 실내에서 유리 카운터 너머로 건네받은 것 외에는 다른 점이 없다. 어쩌면 이기적 이게도, 그 식당이 거리에 머물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한국어와 중국어도 담겨있는 Times Square의 광고판처럼 New York 시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함께 변화한다. 이 과정 속에서 추억에 남는 곳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변화하기도 하고, 이를 추억하는 사람들 덕에 그 모습 그대로 살아남기도 한다. 평소처럼 시키는 Corned Beef Hash가 더 특별하게 느껴지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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