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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Dec 23. 2021

신발장

할아버지가 주신 편지를 읽으며

어렸을 때 기억 속의 할아버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신 분이었다. 동네 식당이나 교회를 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 한 명 한 명 멈춰 서서 안부를 물으셨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시느라, 나는 문 앞에 늘어진 긴 줄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중식을 좋아하셔서 할아버지 댁에 가는 날은 자장면을 먹는 날이었는데, 어렸을 때의 나는 먹는 양이 많아서 항상 곱빼기를 시켰다. 그 위로 얹어주시는 탕수육과 유산슬은 배가 터지게 먹고도 남았다. 하지만 정작 당신께서는 많이 드시지 않았.


조금 머리가 크고 나서는 그런 신의 모습이 나약하다고 느. 설프게 성숙해진 마음에, 내가 좀 더 무거운 짐을 지고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디든지 베푸려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관대하기보다는 헤프다고 느꼈고, 현실과는 괴리가 있는 듯했다. 특히 무한경쟁사회에서는 아올 이득도 없는 데다가, 오히려 우습게 보일 것 같은 정만 들었다. 누구나 해야 한다고 하지만 따르지 않는 기준들을 엄격하게 맞추는 당신께서 좀 더 내려놓기를 바랐다.

자장면을 보면 할아버지 생각이 많이 난다. 출처: Serious Eats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오랜 기간 타지 생활의 영향이 컸다. 가족의 품을 떠나 머무른 곳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야 했다. 홈스테이와 기숙학교를 거치면서 할아버지보다는 같이 성장통과 과도기를 겪고 있는 친구들의 말이 더 와닿았다. 그리고 소 거친 표현과 행동 고지식하게 물러서는 것보다 더 력적으로 느껴졌다. 위태로운 외줄 타기처럼 경계를 오가는 은 낭만적으로 보였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이들에게 강한 척을 했다. 일부러  목소리를 고, 나약한 부분을 감추려고 애썼다. 하지만 가시 많은 밤은 충에 약하, 가시 하나 없는 감자는 끄떡없다.  있는 성분 때문이다. 내가 투른 방식으로 세운 가시는 사람들을 밀어냈고, 오히려 안에서 더 갉아먹기도 했다. 반면 모두에게 진심으로 대한 할아버지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었다. 자주 웃으시는 당신의 모습 뒤 배겨진 굳은살을 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기억을 잃어가실 때쯤이었다.

어렸을 때 조부모님께 Guam 여객선 여행을 보내드리겠다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간이 너무 흘러버렸다.

할아버지는 일찍이 형제와 부모님을 여의셨다. 어린 나이에 형 사고로 돌아가셨고, 얼마 안 지나 부모께서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사진으로 본 적은 없지만, 그리워하던 형의 모습을 닮았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가족을 잃고 사촌과 함께 지내셨으니, 가까운 가족에 대한 소망이 분명 크셨을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아버지와 고모 외에도 조카들까지 항챙기셨는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에게 있어 가족의 범주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넓은 편이다. 사촌누나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고모와 삼촌과 연락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좀 더 나아가, 미국에서 만난 친구와 그 가족들도 나에게는 내 가족의 연장선이다. 알게 된 지 몇 달밖에 안된 직장동료라 하더라도 집으로 초대하고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를 많이 닮아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친한 동생을 초대해 같이 함께한 점심식사다. 추운 날씨에 몸을 녹일 남부식 칠리와 핫도그를 준비했다.

신발장은 나가기 편하도록 바깥쪽을 향하게끔 정리한다. 특이하게도 할아버지는 신발을 정리할 때 안쪽으로 돌려놓으셨다. 가족이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일찍부터 소중한 연을 잃으셨기에, 이를 베푸는 것으로 채우고 싶어 하셨던 것 아닐까. 나도 홀로 미국에서 터를 잡아가면서 곁에 누가 없는 공허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더더욱이 만나게 된 이들을 지나가는 덧없는 인연으로 여기지 않고, 내 안에 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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