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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Dec 30. 2021

완벽한 계획은 없다

베이킹을 하며

작년 격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이것저것 충동구매를 했다. 머핀 틀, 거품기, 유산지 등을 사다 보니 예산을 훌쩍 넘겼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라 끝은 봐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터넷에 올라온 레시피 마구잡이로 따라 해 봤다. 마들렌을 굽기도 하고, 에그타르트도 만들었다. 하게 5 생크림 딸기 케이크 했다가, 3번째 제누아즈에서 포기하고 마무리한 적도 있다. 내가 먹는 양이 적다 보니 이렇게 수없이 생산되는 빵들은 고스란히 가까이 사는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한동안 집에는 은은한 버터 향이 가득했다. 반죽이 눌어붙은 도마와 설탕 범벅의 그릇은 싱크대에 가득 차 있었고, 속 달궈지는 오븐 덕에 난방을 딱히 할 필요가 없었다. 이커리에서 사 온 빵처럼 모양이 일정하지는 않더라도 갓 꺼낸 따뜻한 빵은 그 나름대로 먹을만했다. 이전에 신경 쓰지 않았던 설탕과 버터 함유량을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서 조금 줄여보기도 했지만, 결국은 시중에 파는 그 맛이 나지 않아 본래의 레시피로 돌아가고는 했다.

케이크에 들어갔던 제누아즈. 원래 5개를 만들 계획이었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3개에 만족해야 했다.

내가 다른 요리보다도 제빵을 먼저 선택했던 것은 맛도 있지만 계량에 있었다. 손맛과 눈대중으로 맞추는 양념의 비법은, 고지식한 나에게는 방정식 하나 없는 미지수다. 한 줌, 한 꼬집 같은 애매한 계산은 매번 맛이 달랐고, 싱거운 국물을 어떻게든 고쳐보려다 매운 소금물을 만들기 일쑤였다. 그렇기에 나는 계량컵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베이킹을 선택했다. 언제든지 같은 맛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이 편했. 이미 많은 사람들이 거쳐가면서 정량화된 레시피는 언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려줬으니까 말이다.


주어진 설명대로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도 쉽게 납득할 수 있었다. 한 요리사 분의 동영상을 통해 만들었던 빵은 우연히 지인을 통해 그분의 평가를 받았다. 1그램까지 놓치지 않고 레시피를 던 요리사인 만큼, 사진만 보고도 평가는 정확하고 명료했다. 점수는 6점. 버터와 반죽이 덜 섞인 채 가라앉아 고르게 구워지지 않은 탓이었다. 나는 재료의 양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리고 이전의 실수를 고쳐 다시 구운 빵은 훨씬 더 맛이 좋았다.

가장 많이 만들었던 초콜릿 바나나 브레드. 반쪽은 친구 가족에게 선물했다.

안타깝게도 이처럼 확실하게 매뉴얼대로 진행되는 일은 거의 없다. 주방 밖의 일은 저울로 가늠할 수 없고, 충분히 설계한 목표도 틀어지기 마련이다. 완벽하게 마쳤다고 느낀 프로젝트의 고객사가 몇 달 후에 문제제기를 하거나, 몇 번씩 검토하고 제출한 여권 서류가 퇴짜를 맞기도 한다. 학생 때였다면 하소연하며 여기저기 신세한탄을 했을 테지만, 이제는 나 자신 외에는 해결할 수가 없기에 재빨리 대안을 내놓는 연습을 한다.


계획의 완전한 성공을 기대하는 일은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에게 충분히 있을 만한 자신감이다. 하지만 어쩌면 거만한 태도일지도 모르겠다. 모든 변수에 대해 이해하는 듯한 마음가짐은 일을 그르쳤을 때 더 큰 좌절감이 온다. 그 계획 외에는 탈출구가 없기 때문에 배수의 진에서 실패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매번 임한다면 그것은 배수진이 아니라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무인도와 같이 황량할 테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쫀득한 브라우니는 초콜릿 케이크여야 했고 홈이 난 와플은 팬케이크여야 했다. 출처: Pixabay

올해는 다사다난했다. 마스크 없이 일상생활로 돌아갈 것이라는 순진한 기대는 일찌감치 접었다. 비자 문제로 발이 묶여있는 동안 소중한 사람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고, 찰나의 자만과 실수로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많았다. 작년에 세웠던 야심 찬 목표가 어느새 궤도에서 벗어난 것을 보면 한 치 앞 미래도 알 수 없는 것 같다. 베이킹파우더를 깜빡 잊고 만든 케이크가 브라우니가 되고, 고기 망치로 잘못 두드린 팬케이크가 와플이 되었다고 한다. 미리 쓴 구상 안에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고 동시에 써보는 연습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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