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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Apr 11. 2022

아버지에 대하여

멀리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27년 아버지와 함께 하면서 나는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잠깐 머뭇거리신 찰나에  순간이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주변 사람들에 아버지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아버지와 전공이 같기에 나도 같은 "이과"로 비치고는 하는데, 사실 나는 전형적인 "이과"와는 거리가 멀다. 슬픈 영화를 볼 때마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음악과 감성에 젖어 글을 쓰는 나와 달리, 아버지는 보다 실용적인 것을 추구하고 냉정함을 유지하신다. 랜 유학생활을 거치면서 자라온 환경도 많이 달랐기에, 족이 아니라고 할 정도로 아버지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행동이 굼뜨고 느릿느릿한 편이다. 만한 포츠를 섭렵한 아버지로서는 답답했을 것이다. 스키를 꾸역꾸역 배워 겨우 타게 되었을 때쯤, 바로 스노 보드를 배워야 했다. 겁이 많아 낙엽처럼 대강대강 내려왔다가, 혼이 나고 다시 탄 기억이 있다. 넘어진 친구들을 따라 뛰어가는 다른 부모님들과 달리, 아버지는 오히려 넘어지면 웃으 잘했다고 하셨다. 짧은 박수에 이어 곧바로 함께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운동신경도 없고 흥미도 없던 나는 매번 고역이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가 쏟은 노력에 비해 잘하는 운동은 없지만, 못해본 것은 없어 여가시간을 함께 할 동아리를 찾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아마 좀 더 열심히 했더라면 주전 자리 하나 정도는 손쉽게 꿰찼을 것이다.

그렇게 싫어했던 스노 보드지만, 이제는 자주 가지 못하는 일정에 아쉬워한다. 출처: Pixabay

친척분들과 친구들은 내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고 한다. 삼촌은 어렸을 적 따랐던 사촌 형의 말투와 습관이 그대로 담긴 나를 보았을 때 친숙함과 어색함이 교차한다고 하셨다. 끔 안부차 연락을 드릴 때에도 목소리가 비슷해 신기하다고 하신다. 얼마 전 아버지가 미국에 오셨을 때, 함께 식사했던 친구들은 가족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웃었다. 동생이 종종 보내는 문자 속 가족는 내 어릴 적뿐만 아니라 삼사십 년 전의 사진들도 섞여있다. 하나둘 넘겨보다가 처음 보는 나의 사진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니, 구석에 82년이 찍혀있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 옆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10대의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아버지는 나비넥타이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족 앨범 속에는 국민학교 시절 수학경시대회 시상식에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있는 어린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선글라스청바지 옷차림으로 친구들과 함께 화창한 날씨의 여유를 즐기는 젊은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학사모를 쓰고 허리를 곧게 고 가족과 함께 서 있는 사회초년생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그리고 어느새 길어진 넥타이를 매고 서류가방과 함께 현관문을 나서는, 내가 아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이제 와서야 장난기 어린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뒤늦게 조금씩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차려입는 행사에서는 꼭 나비 넥타이를 찾는다. 출처: Unsplash

학생 때는 소설이나 신문에서 나오는 쓸쓸한 가장들의 모습은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사회비판의 요소가 과하게 더해진 풍자라고 생각했다. 일찍 퇴근하시는 날 저녁식사를 같이 하며 나누는 대화, 여유로운 주말에 함께 하는 운동은 나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조수석에 앉아 아버지가 어렸을 적 들었던 7,80년대 록 음악을 같이 듣기도 했다. 하지만 돈독한 가정 안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는 소원하고,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는 것을 어색해하고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주변의 불평을 들어보면 서로 간의 공감대가 없고, 엄격한 도덕적 잣대에 이미 지쳐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라는 진부한 면접 대사가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것은 아닐 것이다.


첫째로 살아가면서 좋으면서도 안타까운 것은 내가 아버지의 첫 자식이기에, 나도 내가 처음이지만 당신 또한 처음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나온 당신의 첫아들이며, 동시에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던 자식이기도 했다. 나에게 적용되었던 훈육방식이 동생에게는 다른 모습을 보며 가끔은 아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지만, 함께 성장해나갔다는 의미에서 아버지와 동질감을 많이 느다. 어렸을 때 받았던 조언이 크고 나서 다르게 다가오고,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바뀌어가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며 나처럼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점점 느끼게 된다. 다만 제자리에 서있기 위해 말없이 많은 힘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미국에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날이 있다. 그 날의 감사는 쉽지만, 꾸준함은 어렵다. 출처: New Yorker

이상적인 가장의 역할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아버지는 가족을 우선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관리하는 것조차 버거운데, 지금 나이에 부양할 가정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버지도 나와 같은 성격이었지만, 나의 존재가 세상에 나옴으로써 당신을 변화시켜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당신의 경력에 제동을 걸었을 수도 있고, 쉴 수 있었던 순간들조차 숨 가쁘게 달리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없었다 같은 가정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와 내가 이번 생에서 났다는 것이다. 아버지와 달라지기 위해 발버둥 쳐본 적도 있고, 분리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기도 했지만, 결국 나의 뿌리로 돌아. 그리고 나는 이 인연에 감사한다. 멀리 있는 아버지께 편지 아닌 편지를 보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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