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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비늘 Nov 14. 2021

가속도의 한계

야근 후 Whole Foods을 다녀오면서

야근을 할 때면 회사 근처 식료품점의 샐러드 바에서 저녁을 산다. 접시마다 음식 이름과 재료, 칼로리 등이 적혀있어 식단을 짜는데 어려움이 없다. 이것저것 집게로 집어 종이 용기에 담은 다음, 무인계산대 앞에서 무게를 재고 카드로 계산하면 된다. 계산대 옆 통의 버튼을 눌러 플라스틱 수저를 받으면 식사 준비는 끝이다. 줄이 길지 않은 늦은 저녁 시간에는 음식을 고르고 나서 계산까지 5분 채 걸리지 않는 과정이다. 불과 5,6년 전 줄 서서 한참을 기다렸던 것과 비교하면, 이제는 하루에 거의 30분가량은 아껴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


어느 날 하루는 할머니 두 분이서 줄 맨 앞에서 계속 기다리시고 있는 것을 보았다. 무인계산대를 쓰실 줄 몰라 직원이 올 때까지 양보하고 계시는 것이었다.  직원이 와서 도와드리기는 했지만, 처음 보는 광경은 아니다. 지하철 입구 앞에서 매표소를 찾라, 음식점 키오스크 앞에서는 결제 버튼을 찾느라 헤매 들도 적지 않다. 연스럽게 엄지손가락으로 핸드폰을 켜고 개표구를 찍고 가는 사람들 속에서 안절부절 기다리분들 종 보인다. 그리고 전자카드 대신 지폐나 동전을 주섬주섬 꺼내는 분들 뒤에 선 사람들의 한숨 소리도 들린다.

뉴욕 지하철의 개표구 사진이다. 아직까지도 지하철 표를 사서 쓰는 사람들이 꽤 있다. 출처: WSJ

밀레니얼 세대로 태어나 기계를 다루는 것은 나에게 평범한 일상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컴퓨터 과목이 있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전자칠판을 쓰기도 했다. 새로운 앱을 쓰더라도 익숙해진 손에 어색한 느낌은 없다. 굳이 설명서가 없이도 금방 신제품의 기능이 파악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렸을 때 어른들이 차근차근 설명서를 읽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내가 대가 쓰는 기기와 관심사를 배우기 위해 직접 찾아봐야 하는 때가 있다.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빨리 움직여야 한다는 전 미국 대통령의 말처럼,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은 사회의 흐름에 따라가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학교 졸업 논문을 쓸 당시에 내가 읽었던 논문들은 대부분 노동경제학 관련이었다. 고용률, 최저임금 등을 다루는 논문들을 많이 읽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논문 중 하나는 자동화에 관한 것이었다. 가내수공업뿐만 아니라 컴퓨터를 쓰는 일도 단순 업무는 이제 저렴해진 기계로 충분히 대체가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임금을 인상하여 생활여건을 보장하려 하면, 되려 기회비용이 늘어나 자동화를 더 가속화시킬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새로운 직업들도 생겨나지만, 기존의 많은 일자리들이 없어지고 불가피하게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하는 빈도수도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젊은 세대에게는 비교적 쉽고 도전적인 일이더라도, 이미 자리를 잡은 기성세대와 그 이의 세대에게는 오랫동안 쌓아왔던 실력을 무효화시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David Autor 교수. Routine Task Intensity 측정을 통해 자동화에 취약한 직업군에 대해 연구했다. 출처: The Economist (Lauren Crow)

최근에 영화를 한 편 봤는데, 나 나름 재밌다. 린 전개 대신 섬세한 미장센과 배경이 매력적이었고, 속편이 계획된 만큼 다음 내용이 기대가 되었다. 하지만 개봉되기 무섭게 평론과 기사들이 수백 개 이상 쏟아져 나왔다. 무미건조했다는 평가부터 감독의 전반적인 경력에 대한 비판까지, 이목을 끌었던 영화인만큼 혹독한 평가도 따라오는 듯했다. 유명세를 탄 작품인지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종이 신문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에서 실시간으로 날아드는 날이 선 비판들을 견디려면 웬만한 실력과 자신감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요즘 언론의 관심을 받는 기업인이나 연예인들이 공황장애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천천히 성장하기에는 이제 보는 눈도 많아지고 경쟁도 더 치열해지며, 그만큼 야박해진 것도 있을 터다.


이제는 서로가 무엇을 하는지 알기 쉬워졌다. 집 안에만 있어도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있고, 이용하는 플랫폼에 적합한 인격체를 새로 만들기도 한다. 코로나로 격리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심화된 것 같기도 하다. 다양한 매개에서 많은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면, 그 가면의 무게를 견디느라 피로가 누적된다. 다른 사람들의 경황을 끊임없이 듣고 찾아보는 동시에, 내가 유지하고 있던 템포의 생활방식이 조금씩 무너지기도 한다. 무언의 압박감이 짓누르고 계속 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이 속도에서 벗어나 취하는 휴식이 더 중요해진다.

나만의 페이스로 생활하기에 어려울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출처: Forbes

New York의 신호등은 바뀌자마자 걷기 시작한 사람에게도 버거운 속도로 재빨리 색을 바꾼다. 그 새를 참지 못하고 비집고 들어오는 차들을 피해 지나가야 할 때도 있. 람들 사이로 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빨리 나아가야 한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도태된다. 나 또한 점점 빨라지는 속도에 숨이 찰 때도 있다. 허덕이는 와중에도 그런 속도를 남에게 요구하기도 하고, 잠깐의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닦달하도 한다. 그래서 정신없는 하루지라도 가끔은 속도를 줄이려고 한다. 도로는 항상 곧지 않고, 굽은 도로에서는 미리 속도를 줄여야 한다.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페달을 밟은 발에 힘을 조금 빼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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