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동근 Sep 07. 2016

< 이등병의 날 - Part 1 - >

- 아버지의 자존심 -

‘참자... 참자... 이 순간만 참고 넘기자...’

나는 그렇게 속으로 수없이 되내며, 견디고 또 견뎌내고 있었다.

.

.

.

199X년의 어느 여름밤......

남한의 최북단 강원도 모 처의 군부대에서 나는 야간 탄약고 경계근무 중이었다.


한낮의 찌는 듯했던 대기는 밤이 되니 한 풀 꺾여 있었고, 거기에 산들이 뿜어낸 청량한 산기운이 더해져서인지 들숨으로 느껴지는 공기는 선선하고 깨끗했다.

그렇게 적당히 여름 습기 머금은 투명한 대기 위로 쌀알 같은 별들은 금방이라도 우수수 떨어질 것처럼 촘촘히 박혀있었고, 어둠이라는 장막 안에서도 강원도의 산세는 그 유려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 벅차오르는 풍경들, 하지만 그런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나는 잔인한 인내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퍽! 퍽! 퍼벅!’

조장 녀석의 구타는 계속 이어졌다.


군대를 다녀온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의 군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후 시작된 본격적인 군생활은 내가 생각해 왔던 군대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내가 너무 이상적인 군대의 모습을 그려왔던 것일까?

그곳엔 조국을 지키고 있다는 자긍심이나 국가의 유니폼이라 할 수 있는 군복을 입고 있다는 명예 따윈 없었다.

또 흔히 들어오던 군가 속 ‘싸움에는 천하무적, 대신 사랑은 뜨겁게’한다는 그런 ‘멋진 사나이’는 없었고 오로지 성난 사내 녀석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내뱉는 말의 절반 이상이 욕설과 음담패설이었고, 간부들의 눈이 미치지 않는 곳곳에서 구타가 이루어졌으며 또 차마 이야기하기 힘든 일들이 저질러지고 벌어졌었다.

그게 내가 겪은 군대의 모습이었다.


남한과 북한이 쏘아대는 전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TV나 라디오조차 보고 듣기 힘들었던 폐쇄적인 곳에 부대는 위치해 있었다.

그랬던 터라 한창 젊은 사내들의 청춘의 갑갑증들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라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저게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일까?’란 생각을 들게 하는 행동들을 일부 간부나 사병들은 저지르고 있었다.


밀레니엄이란 말이 흔히 쓰이던 그때, 마치 ‘세기말’적인 혼란과 혼탁이 모두 모여 있는 듯했던 곳.

그게 내가 겪은 군대의 모습이었다.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훈련과 작업에서 오는 육체적 힘듦이야 군인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지만, 불합리한 그들의 문화와 시간이 지날수록 삭막해지고 메말라가는 나의 감성들과 정신들을 바로보기 힘듦이 나를 지치게 했다.


그리고 그런 힘듦 속에서 나를 더욱 괴롭혔던 건, 나보다 대여섯 달 먼저 자대에 배치된 그때 당시 일병이었던 경북 포항 출신 고참의 괴롭힘이었다.

군대에서 흔히 쓰는 용어인 ‘갈굼’이란 것을 그 고참 녀석은 나에게 부렸었다.

  

하루 24시간 내 곁을 맴돌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괴롭히던 그 녀석은 군 생활의 유일한 낙이 나를 갈구는 데 있는 듯했다.

특히나 야간 경계 근무처럼 그 녀석과 단둘이 남겨지는 시간은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3시간여의 경계 근무 시간 내내 그 녀석의 구타와 욕설이 이어졌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단지 나의 태생이 ‘전라도’라는 이유, 그것뿐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포항 출신 고참 녀석의 구타는 이어졌다.

한창 젊은 나이였었고 한창 운동이란 걸 하다가 입대했던 터라 그 녀석을 그대로 들어서 땅에다 매다 꽂고 싶은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들었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보충대에서 부모님과 헤어질 때 보았던 어머니의 슬픈 마지막 모습이 마음에 걸려서라도 참아야 했지만, 그 무엇보다도 엄한(?) 것이 군법이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하급자가 상급자를 폭행할 경우 ‘하극상’이란 명목은 당연히 붙는 것이었고, ‘구타 유발죄’란 생소한 죄목이 덧붙여진다는 게 군법이었다.

‘구타 유발죄’

‘맞을 짓을 했으면 맞아야 한다’는 누가 보더라도 가해자 우선의 법이 적용되는 게 군대였다.

거기에다 간부들도 하극상과 구타유발죄를 힘주어 말하며 상급자가 때리더라도 하급자는 참아야 한다는 분위기를 종용하고 있었고, 또 실제로 구타를 당했음을 고한 하급자가 때린 상급자와 함께 영창에 가는 경우를 보았던 터라 포항 고참의 폭력을 나는 참아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날은 더 참고 또 참아야 했다.

그다음 날이 ‘이등병의 날’이라 부모님들이 부대에 오시기로 했던 것이다.


이등병의 날.

사관학교 출신 대대장의 일종의 보여주기 식 군 행정 중 하나였던 그것은 이등병을 둔 부모님들을 부대로 모셔 부대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또 이등병 자녀들과의 외출과 외박을 허락하는 그런 날이었다.

그래서 더욱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 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3시간여 동안 줄곧 꼿꼿이 서서 맞고 있자니 가슴속 분노만이 터질 듯 치밀어 오를 뿐이었다.


화를 억누르려 주먹을 부르르 쥐어보기도 했고, 어금니가 깨져라 이빨도 앙당 물어보았으며, 그 녀석이 내뱉는 온갖 험한 말들을 듣지 않으려 억지로 내 의식을 무의식 저 너머로 보내보기도 했다.

밖에서는 그 녀석의 폭력이, 안에서는 나의 폭력을 잠재우기 위한 나만의 싸움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참자... 참자... 오늘만 참고 넘기면 내일은 부모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


나의 이런 격정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외면한 수많은 차가운 별들은 내 머리 위에서 얄미울 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고, 무의식 저 너머로 들려오던 어지러운 풀벌레 소리는 내 귓가에 맴돌다 흩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잔인한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다.


내일이 있었기에 참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 Part 2. 에서 계속 -


< • 군에서의 제 개인적인 경험을 쓴 글일 뿐, 군이나 군 문화 전체를 비방하는 글이 아닙니다.

  •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글이 아닙니다.

  • 지금 이 시간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 어머니의 품 -3- >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