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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근 Sep 09. 2016

< 이등병의 날 - Part 2 ->

- 아버지의 자존심 -

(참고 : 군부대 단위로는 분대 - 소대 - 중대 - 대대 등이 있으며 그 위로는 연대, 사단, 군단 등이 있음)


다음날.

아침부터 부대는 전부대원들이 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누가 온다고만 하면 쓸고 닦는 게 군대였지만, 민간인들에게 부대를 공개하는 날이다 보니 부대 전체가 마치 사단장을 맞이하는 듯한 그런 분위기였다.


한 달 전부터 닦고 또 닦았던 곳을 다시 닦으며 부모님과 만날 시간이 오길 기다렸다.

그때가 100일 휴가(그 당시 군에 입대한 지 백일이 되는 날에 이등병들에게 주던 4박 5일 휴가) 전이었던지라, 입대하고 나서 처음으로 부모님을 뵙는 날이었으니 더욱 기다려졌다.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 설렐 수만도 없었다.

백일 휴가를 다녀온 이등병들에게만 외박을 허락하고 다녀오지 않은 이등병에겐 외출만 허락한다더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 많은 수의 이등병들을 다 부대 밖으로 보내자니 지휘부에선 적지 않은 부담을 갖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행사 당일까지 이등병들에 대한 외출․외박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해 차를 오래 타지 못하시는 어머니가 단지 아들내미 몇 시간 보자고 이 강원도 산골짜기까지 오시게 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행사 일정이 결정된 후 일괄적으로 이등병들에게 각자의 집에 전화를 걸도록 했을 때 나는 부모님께서 차라리 오시지 않았으면 했었다.


“어머니, 부대에서 이런 이런 행사가 열립니다. 그래서 알려 드리려고 전화했습니다.”

“오매. 오매. 그래야. 그라믄 그거시 언제 한다고 그러냐?”

“저... 그게... 외박증이라도 받으면 모르겠지만, 단 몇 시간 보자고 이곳까지 오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백일 휴가도 있으니 그때 집에서 뵈었으면 합니다.”

“아따 고거시 뭔 소리 다냐. 몇 시간이 아니라 단 몇 분을 본다고 해도 우리 아들 보러 가야제. 강원도가 아니라 미국이라도 가야제 그거시 뭔 소리 다냐!”


군기 들어간 ‘다나까’ 말투에서 아들의 힘든 생활을 짐작하셔서 였을까?

어머니는 조금 울먹이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완강하셨다.

간부들이 고참들 주도하에 이등병들이 각자의 집에 전화를 꼭 하도록 한 특별한 배려(?)만 아니었다면 아마 나 혼자만 알고 넘어갈 일이었으나, 통화하는 내내 고참이 옆에서 떡 하고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행사 내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렇게 부모님은 오시기로 하셨다.

지금에야 전라도 광주에서 강원도 가기가 그나마 수월 타고들 하지만, 그때는 서울을 거처 강원도로 들어가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KTX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던지라 강원도 가는 길은 그렇게 쉬운 길만은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전남에 집을 둔 부대원들은 4박 5일 휴가를 받더라도 오다가다 이틀은 길바닥에서 보내게 되는 것에 불만이 많았었다.


하지만 걱정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전날 밤, 포항 고참 녀석에게 맞은 내 두 볼이 너무 부어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때리고 때리다 제 풀에 지친 고참 녀석이 마지막엔 손바닥으로 뺨을 연신 때린 게 원인이었다.


‘젠장, 하필 오늘......’


때린 고참 녀석에게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다.

찬물로 부어오른 내 뺨을 적시고 또 적셨다.

마치 볼거리를 앓은 것처럼 땡땡하게 부어오른 볼은 만지기만 해도 통증이 심했다.


고갤 들어 거울을 보니, 더 한심했다.

마치 보톡스 부작용 환자처럼 볼 부분만 도드라지게 부어있었다.


‘엄마, 아빠한테 뭐라고 핑계를 대지?’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 방송이 들렸다.

“전 부대원 A급 전투복으로 환복 후 연병장에 집합한다!”

각 잡힌 깔끔한 전투복을 입은 부대원들이 중대별로 연병장에 집합했다.

이 중대나 저 중대나 짝대기 4개 단 병장들은 허름한 군복을 입었음에도 멋들어졌고, 얼룩무늬가 선명하고 뚜렷한 새 군복을 입은 짝대기 1개 이등병들은 남의 옷 빌려 입은 것처럼 어딘가 어수룩했다.

하지만 그 어벙한 이등병들도 그 날 만큼은 가족들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인지 다들 상기돼 있었다.


중대별로 열과 오를 맞추고 나자 대대 간부 중 한 명이 연병장 단상에 올라 행사 예행연습을 지휘했다.

주로 방문객들에게 각 잡힌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과 방문객들과 함께 하는 행사를 위한, 예행연습이랄 것도 없는 연습이었다.

하지만 외부인들에게 부대를 공개해야 하는 대대 간부의 입장은 그리 편치는 않은 듯했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하나 따져가며 부대원들을 닦달했다.

“야! 2중대와 3중대 간격이 너무 좁잖아!”

“행사 진행 중엔 모두 연병장 뒷 쪽으로 이동하라고 했잖아!”

“줄다리기할 밧줄은 보기 싫지 않게 반듯하게 놓으라고!”

몇 주 전부터 실이 노이 되도록 지겹게도 해온 연습과 말들을 우리는 행사 당일에도 하고 들어야 했다.

   

꼼꼼한(?) 대대 간부 주도의 예행연습을 끝내고 우리는 각 중대․소대별로 해산했다.

내무반으로 돌아오자마자 병장들은 아침부터 시달렸다며 툴툴거리며 침상에 널브러졌고, 상병들은 매의 눈으로 일·이등병들이 무슨 잘못한 것이 없는지 꼬투리를 잡으려 애썼다. 그리고 그런 매들의 눈을 피하려 일병들은 없는 일도 만들어 열심인 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누가 보더라도 이등병스럽게 침상 끝에 각을 잡고 앉아 시간이 빨리 흘러가길 바랬다.


‘째깍... 째깍... 째깍...’


내무반 벽에 걸린 국방부 시계는 참 더디게만 갔다.

그러다 얼마 후 방송이 나왔다.

“중대에 있는 전체 이등병들 중대 사열대 앞으로 집합!”


중대에 있는 이등병들이 전부 모였다.

걔 중엔 내 동기들도 있었고, 꼴에 군대라고 한 달 먼저 들어온 고참 이등병들도 있었다.

눈치 볼 고참들 없이 우리끼리만 있어서였을까?

간혹 복도에서 서로 지나치다 보았을 때의 긴장된 얼굴들이 그때만큼은 모두들 환하게 웃고 있었다.

혹시라도 보고 있을 고참들의 눈 때문에 크게 말하고 떠들 순 없었지만 우리들만의 손짓과 눈짓 그리고 소곤거림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던 그때, 소대장 한 분이 나오셨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지? 혹시 오늘 가족분들이 못 오시는 사람은 이쪽으로 열외 해!”

우리가 모여 있는 곳의 반대편을 가리키며 소대장이 말했다.

그리자 중대 20여 명의 이등병들 중 4,5명이 그켠으로 걸어갔다.


‘쟤 들은 오늘 가족들이 못 오는가 보구나’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 네댓 명 중에 유독이나 몸이 약해 내가 마음을 써주던 두 동기 녀석이 포함되어 있어 더욱 그랬다.     

그 한편에 서서 남겨진 이쪽을 바라보는 녀석들의 눈빛에서 부러움과 쓸쓸함이 함께 묻어났다.

마음이 복잡했다.


열외 된 이등병들은 가족들이 못 오는 이유를 소대장에게 말했고 소대장은 그 이유를 받아 적었다.

그리고 다시 내무반 안으로 돌려보내졌다.

돌아서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들의 뒷모습과 발걸음이 쓸쓸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국민학교 운동회 날, 엄마가 오지 못해 운동회 내내 풀이 죽어있던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괜시리 콧등이 시큰거렸다.


                                                              - Part 3.에서 계속 -


< • 군에서의 제 개인적인 경험을 쓴 글일 뿐, 군이나 군 문화 전체를 비방하는 글이 아닙      니다.

  •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글이 아닙니다.

  • 지금 이 시간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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