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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EVO X HLUT 첫 컬래보레이션 전시를 둘러보고

빈티지 자동차와 빈티지 가구가 어우러진 공간이 준 즐거움

[ 2022년 4월 19일에 제 웹사이트 jasonryu.net에 올린 글입니다 ]


2022년 4월 17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는 빈티지 가구점 흘러트(HLUT)를 방문했습니다. 특별히 가구에 관심이 있어서 찾은 것은 아니고, 그곳에서 카클럽 에레보(EREVO)와 흘러트의 첫 컬래보레이션 전시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죠.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에레보 신사는 자동차 매체 기자 출신 지인들이 기획하고 운영하는 공간이라, 몇 번 방문한 바 있어요. 자동차를 매개체로 사람들이 어울리고 문화를 나누는 곳이라, 언제든 마음 편히 들러 커피 한 잔 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죠. 그래서 이번 에레보와 흘러트의 합동 전시도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전시는 4월 9일에 시작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전시 마지막날 늦은 시간에야 겨우 갈 수 있었네요. 예상과 달리 정말 많은 분이 방문해 계셔서 좀 놀랐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자동차 자체에 매몰되어 있던 저로서는 이런 전시가 조금 낯설기도 한데요. 자동차를 바라보고 느끼는 폭을 넓힐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대상에 대한 느낌과 이해가 달라질 수 있고, 자동차에 대한 메마른 감성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차를 가슴으로 좋아했던 옛날로 돌아가는 기분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직접 현장을 찾으니 ‘오길 잘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된 차들도 차들이지만, 금세 어떤 주제와 분위기인지 느낌이 딱 왔거든요. 다양한 시기에 나온 다양한 종류의 가구들, 카페트, 미술품들과 산업 디자인의 황금기에 여러 이탈리아 카로체리아들이 각자의 개성과 특색을 담아 디자인한 차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작은 현대미술관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1996년이었나, 서울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다빈치에서 현대문명으로’ 특별전에서 피닌파리나의 디자인과 차들을 접했던 기억이 떠오를 만큼요.


우선 전시된 차들의 면면이 재미있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나와 1970년대 후반까지 만들어진 알파 로메오 GT 시리즈의 고성능 모델인 2000 GTV가 있었고요. 1980년대 초반에 나와 무려 2000년대 초반까지 만들어진 1세대 피아트 판다의 후기형 모델,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에 공식 수입 판매된 바 있는 판다 4×4 i.e.가 있었고요. 1980년대 중반에 나와 1990년대 후반까지 명맥을 이은 페라리 테스타로사 시리즈의 중기형 모델인 512 TR이 있었습니다.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차는 알파 로메오 2000 GTV입니다. 알파 로메오의 GT 시리즈(105/115 시리즈)는 우리나라 브랜드 차들도 여럿 디자인한 이탈디자인의 창업자 조르제토 주지아로가 카로체리아 베르토네(Bertone)에서 일할 때 디자인했던 차로 알려져 있죠.



2000 GTV는 1970년대 초중반에 나왔지만, 차체 기본 설계와 디자인은 196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셈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온 여러 알파 차 가운데에서도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매력적 디자인이 돋보입니다. 2+2 좌석 구성의 작은 쿠페 차체에 2,000cc 엔진을 얹은 차 자체는 그렇다 치고, 그 시절 자동차 만들기를 짐작할 수 있는 특징들을 구석구석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죽과 나무의 질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내장재가 특히 그렇죠.


어쨌든 대량 생산 모델이기 때문에 생산성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강판 가공 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에 만들어낸 차체에서 은은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선과 면은 독특한 빨간색 페인트와 어우러져 만만찮은 에너지를 뿜어냅니다. 의도적 치장이 아니라 필요와 목적에 합당하게 선택한 것처럼 보이는 크롬 도금 요소들도 정말 자연스럽게 전체 분위기에 녹아 있습니다.



전시장 앞 공간에 주차와 전시를 겸해 세워진 피아트 판다 4×4 i.e.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피아트의 디자인과 자동차 만들기를 대표하는 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의 디자인은 이탈디자인(Italdesign)에서 맡았죠. 결과물을 내놓은 업체는 다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알파 2000 GTV와 함께 주지아로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판다는 산업 디자인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모델입니다. 디자인 개념의 변화와 더불어 소재의 활용 면에서도 자동차 디자인의 변화를 상징하는 모델 중 하나기 때문이죠. 차체는 물론이고 실내까지도 아주 간결한 선과 면을 조합해 만들었으면서도 빈약하거나 부실하다는 느낌보다는 튼튼하고 당차다는 느낌을 줍니다. 아울러 폭넓게 쓴 플라스틱 부품들은 기능과 생산성, 값을 모두 고려하면서도 차체의 단단한 분위기를 강조하도록 쓰였고요. 대시보드와 도어 패널 같은 실내 요소들을 보더라도 단순한 구성으로 개성을 표현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다섯 개의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피아트 엠블럼이 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플라스틱 그릴은 후기형 판다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윗급 모델인 우노, 티포, 크로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모델에 그와 같은 패밀리 디자인을 반영하면서 피아트의 얼굴을 만들었고요. 우리나라에는 수입차 개방 초기에 공식 수입 판매되면서 가장 많은 장비가 들어간 4×4 모델이 들어와 팔렸는데, 999cc 엔진을 얹은 소형차면서도 당시 국산 소형차들과 비교했을 때 상상을 초월하는 값 때문에 많이 팔리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전시된 차도 그때 공식 수입된 모델로 보이네요.



가장 나중에 나온 모델은 페라리 512 TR입니다. 1984년에 데뷔해 파격적 디자인과 성능으로 세계 자동차 애호가들을 충격에 빠뜨린 테스타로사의 2세대 모델이 바로 512 TR인데요. 기본적 차체 형태와 동력계, 섀시 구성은 테스타로사의 틀을 유지하면서 앞뒤 범퍼와 실내, 일부 장비 등을 새롭게 단장한 모델이죠.


테스타로사의 특징적 디자인 요소 중 하나인 차체 옆의 ‘치즈 커터’ 공기 흡입구와 바람에 휘날리는 스카프를 연상케 하는 어깨선 등은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앞 범퍼와 테일램프 등을 V8 미드엔진 쿠페인 348 시리즈와 비슷하게 손질하면서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좀 엇갈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와 같은 변화는 ‘현대화’라는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고요.



플라스틱, 알루미늄 합금, 강판 등이 골고루 쓰인 차체에서는 소량 생산 환경에서 초고성능 스포츠카라는 차의 성격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기울인 페라리의 고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물론 차를 보는 사람들은 피닌파리나(Pininfarina)에서 작업한 예술적 디자인과 차체를 감싸는 빨간색 페인트 때문에 아래에 담긴 그와 같은 소재 차이를 전혀 느낄 수 없죠.


개인적 기억으로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의 페라리는 ‘움직이지 않아도 달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512 TR을 거쳐 F512M으로 이어지는 테스타로사 시리즈도 그 중 하나였고요.



처음 방문했지만, 행사가 열린 흘러트는 차가 없더라도 공간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정말 멋스럽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카페트, 의자, 테이블 등 다양한 종류의 가구와 인테리어 소품들은 각기 다른 소재와 색, 제작 방식들이 특색있었는데요. 신기하게도 서로 다른 것들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묘하게 잘 어울리더군요. 특히 이번에 에레보와 합동 전시하면서 미니어처 자동차, 자동차 관련 책 등 자동차 소품들을 함께 놓은 모습도 정말 자연스럽고 아름다웠습니다.



이번 전시가 특히 재미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에너지를 공간 안으로 모으는 성격을 지닌 가구와 소품들이 에너지를 밖으로 내뿜는 성격을 지닌 자동차가 하나의 공간에 모여 서로 균형을 이루는 모습이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자동차가 인테리어 소품 역할을 하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차가 내뿜는 에너지가 강했다면, 워낙 생각이 차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제가 다른 소품들로 눈길이 돌아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이처럼 자연스럽게 자동차와 공간이 어우러지는 모습은 사실 일상에서 접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아주 마음에 들었고요. 전시는 끝났지만, 앞으로도 이런 성격의 전시를 접할 기회가 자주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동차 애호가라면 자동차의 매력을 다른 관점에서 느낄 수 있고, 애호가가 아닌 사람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자동차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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