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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콘텐츠 제작자 관점에서 본 뒷광고 논란

올바른 시각과 관점, 정직한 비판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길


요즘 유튜버/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복잡하니 그냥 제작자라고 해 두자) 뒷광고 논란이 일파만파. 두통에 따른 불면증 탓에 끙끙 앓던 와중에, 그에 관한 잡다한 생각들을 조금 풀어보기로.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른바 김영란법) 때에도 그랬듯, 언론을 중심으로 이해당사자 사이에서는 기준 또는 경계나 관행 같은 것들을 놓고 시끄럽게 이야기가 오갔다. 정작 그들의 영역 밖에 있는 사람들은 '된 X이든 진 X든 다 X아니냐'고 생각했다.


내가 보기에는 이번 논란도 패턴은 비슷하다. 이해당사자의 한편이 기성 언론에서 제작자로 바뀌었을 뿐.


궁극적 원인은 돈, 다른 식으로 말하면 거래에 관한 이해와 관념이 이해당사자와 콘텐츠 수용자가 서로 다른 데 있다. 이해당사자란 제작자 그리고 제작자와 관계를 맺고 거래하는 업체를 말한다.


제작자가 상업성을 추구해 수익을 내는 것이 콘텐츠 제작과 배포의 목적이라면, 들여야하는 노력 관점에서 봤을 때 콘텐츠 플랫폼을 통해 광고 수익을 얻는 쪽보다 이해당사자간의 거래를 통해 수익을 얻는 쪽이 훨씬 더 수월하다. 명분도 그럴싸하다. 당사자들끼리는 '윈윈'을 꿈꾸니까. 


그러면 수용자는 그냥 넋놓고 보고만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아마 적은 수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작자 채널이 흥하고 구독자와 시청자가 늘면, 열성 팬들이 생기고 그들의 몰입도도 커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물아일체가 아니라 채아일체랄까...


어느 정도 팬심이 생긴 수용자라면 개개인의 관점은 다르겠지만 각자 콘텐츠나 제작자에 대한 기대치나 기준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웬만한 수용자들은 내 콘텐츠 시청시간이나 구독 및 좋아요 클릭 등이 제작자의 수익으로 연결된다거나, 나아가 그런 행동들이 마치 자신이 제작자의 제작에 참여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채널에 일종의 정서적 자기 지분이 있다고 여기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에서 제작자가 이해당사자의 일원 역할을 '지나치게' 충실하게 하면 수용자와 마찰이 생기기 쉽다. 설령 지나칠 만큼 충실하지 않아도 눈치 빠른 수용자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어? 내 지분이 있는데 왜 제멋대로 딴 쪽에서 수익을 챙기면서 왜 내 편이 아니라 남의 편을 들지?'


답은 간단하다. 이해당사자는 서면이든 구두로든 계약을 해서 갑을관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용자 여러분이 계약을 맺은 것은, 미안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콘텐츠 플랫폼이지 제작자가 아니다. 계약관계에는 '신의와 성실의 의무'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관계는 상식적으로 예의와 배려는 있을 수 있어도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단순한 시청을 넘어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경지에 이른 수용자들은 의문을 넘어 배신감도 느낄 것이다. 자칫 제작자가 선을 넘으면 비난과 사과요구는 당연한 수순이고. 제작자가 거래의 성격을 설명이나 해명하더라도 소용없다. 수용자의 기대치나 기준에서 어긋나면, 수용자가 제작자를 대하는 심리적 태도가 달라질 수 있다. 내가 '준' 관심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공격적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돈 받았으면 다 광고 아니야?'라거나 하는.


제작자의 정체성도 골치아픈 요소다. 누구나 제작자가 될 수 있는(한때 유행한 UCC라는 말처럼) 플랫폼 특성상, 제작자는 아마추어일 수도 있지만 프로일 수도 있고, 개인일 수도 있지만 단체일 수도 있고, 심지어 기성 언론의 한 가지이거나 전직 기성 언론인일 수도 있다. 마지막에 든 기성 언론 관련 예는 좀 더 복잡하다. 관행과 직업관이라는 요소가 크건 작건 개입할 수 있고, 그것이 이해당사자와 수용자 사이의 역학관계를 흐트러뜨리는 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표시광고법이나 공정거래위의 추천·보증 등에 관한 표시·광고 심사지침은 이해당사자와 수용자의 역학관계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만드는 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나랏님들은 수용자들이 '허락하지 않은 이해당사자의 거래'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지 않게 배려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연설명은 논란의 여지가 있으므로 패스.


물론 이런 논란이 그동안 없던 일은 아니지만, 최근 몇몇 사건들로 줄줄이 곪았던 부분들이 터져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문제는 수용자가 제작자에게 직접 돈을 쥐어주지 않는 한, 그것도 업체가 한 방에 안겨주는 만큼 아주 넉넉하게 쥐어주지 않는 한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 아프리카TV의 별풍선 모델이 차라리 수용자가 원하는 콘텐츠 제작에 주는 영향은 더 직접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만큼 위험성도 크지만. 그래서 유튜브도 수퍼챗 같은 기능을 끼워 넣은 거겠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결론은 어딘가 문제가 생겨 틀어막는다고 해서 뭐가 대단히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느낌이 든다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의 생명력을 무엇으로 억누를 수 있을까? 방법과 모양새는 달라지겠지만, 잘 포장된 이해당사자의 거래는 끊임없이 수용자의 관념과 줄다리기를 할 것이다. 그런 와중에 '된 X이든 진 X든 다 X아니냐'라는 욕을 먹으면서도 거래의 맛에 취해 돈만 챙기고 마는 제작자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놈의 거래 때문에 사회적 불신의 골은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든 말든.


이젠 너무나 당연해져서 비판하기가 민망해진 것이 언론의 현실이다. 하지만 욕은 언론이 대표로 먹어도 동호회라는 이름의 포털 카페, 블로그, 웬만한 SNS의 인플루언서들, 유튜버를 비롯한 온라인 크리에이터들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콘텐츠'를 만드는 모두가 상업화되어 있다. 언론에서 곪아터진 문제들이 고스란히 다른 콘텐츠 영역에서도 곪아터지고 있는데, 욕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해야 하는가.


당연한 것이 더는 당연하지 않은 시대는 어디서든 실감할 수 있다. 트렌드라는 이름으로 올바른 시각과 관점, 정직한 비판의 목소리가 묻혀버리지 않길. 콘텐츠에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광고주만의 일이 되어버리지 않길.


나는 20년 넘는 사회생활의 절반 넘는 기간을 글밥먹고 살아왔지만 현실은 여기저기 플랫폼에 이것저것 조금씩 얹어놓기 시작한 듣보잡 초보 제작자의 하나다. 이번 논란은 솔직히 그냥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강건너 불구경하듯 몇 자 적어봤다. 난 어쩔 거냐고? 배는 고프지만, 일단은 가던 길 그냥 가련다. 더 배가 고파지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연기학원 수강신청부터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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