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와 대화한 다음 날 현석은 학교에서 또 하루를 보냈다. 아침에 묵주를 손에 걸고 기도를 드리고 버스를 타서 학교에 도착하고 4시에 끝날 때까지 겉으로 보기에 그저그런 하루를 보냈다. 등교길에 뒤에서 친구가 가방을 발로 차며 거칠게 인사를 하자 받아주기는 했지만 머리 속에는 다미 생각 뿐이었고 수업 시간에 노트 정리를 하다가도 마을에서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하다가 수업시간에 필기해야 할 것을 못 쓰기도 했다. 급식실에서 밥을 먹을 때에는 성호를 긋고 인사를 해야하는데 자신이 기도하는걸 남들이 보는게 부끄러워 배꼽 밑으로 엄지손으로 십자가를 긋고는 밥을 먹었지만 오늘은 급식을 받자마자 한 입 먹고 다 버린 다음 혼자 벤치에 앉아서 예정을 만나 뭘 물어볼지, 설마 예정도 다미에게서 어떻게 타락했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에 어떤 친구가 와서 무슨 고민있냐고 묻자 편두통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학교 생활 내내 온통 정신이 딴데 가있으니 하교할 때쯤이나 되서야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다.
‘차라리 아프다고 집에서 쉴 걸. 어차피 맞닥드려봐야 무슨 생각이 나도 날텐데.’
내일부터는 이러지말자고 다짐하며 현석은 종례인사를 하고는 친구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같이 나가자고 했다. 교문 밖으로 나가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나 먹을까 생각했다. 충동적인 식욕은 없었고 평범한 학생이어야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나온 생각이었다.
“어, 안녕하세요. 혹시 유성문고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동급생이라기에는 누나같은 얼굴의 연령대 여성이 말을 걸어왔다. 작은 마을에 살며 집학교집학교 생활을 하는 현석에게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자체가 편하지는 못했다.
“어... 저기 저쪽 있잖아요. 저 골목에 들어가서 피아노학원 있는 안쪽 들어가면 보이긴하는데... 저기 가서 다시 물어봐야 될 것 같은데요.”
“많이 먼가요?”
“아니요. 가깝긴한데 길이 복잡해서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서요.”
“아... 혹시 데려다주면 안될까요?”
예쁜 누나는 미소로 부탁해왔다. 그냥 낯선 사람 자체도 불편한데, 하필이면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가 말을 걸어서 더 불편했다. 이 불편함의 출처에는 일종의 설렘도 함께 있었다. 고등학생 정도 되보이는데 교복은 또 입고 있지 않은 이 누나는 몇 살일까, 시키는대로 또 물어가며 찾아도 되는데 왜 굳이 데려다 달라고 할까, 그것도 우리 둘이 아니고 나를 콕 찝어서, 혹시 나에게 반했나, 현석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알게다고 했다. 같이 있던 친구에게는 자기도 모르게 안녕이라고 말해버리고 그녀와 함께 서점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석의 머리 속에는 완전히 이 여자 뿐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실제로 자신 옆에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자신과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다미나 마을 일 따위는 머리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그런데 혹시 몇 살이세요?”
“몇 살 같아요?”
“어... 동갑?”
“내가? 중학생이랑? 고마워라. 18살이에요.”
“아, 네. 동안이세요.” 현석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실제 마음에 없는 소리였던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떨려서 그런 것이었다.
“어디 학교 다니세요? 오늘 쉬는 날이에요?”
“수리여고 다녀요. 오늘은 개교기념일.”
“아, 좋겠다.”
여자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현석은 바로 50cm 옆에서 벌어진 그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현석에게 방금 본 그 모습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가장 아름다웠다. TV로 보던 아이돌 여가수, 학교에 나름 인기 많은 젊은 여자선생님, 학교 여학생 친구들, 만화책에서 본 예쁜 캐릭터, 그 모든 것들과는 질적으로 아예 다른 새로운 차원의 아름다움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가장 아름답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현석도 알았지만 그의 세계에서 그것은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 완벽한 존재로서 그에게 다가왔다. 평생 그녀의 자태만 보고 산다면 자신의 삶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만난지 십 분정도 된 운명은 그렇게 가슴을 가득 채웠다.
금방 서점에 도착했고 그녀는 고맙다며 곧바로 서점에 들어갔다.
‘나한테 관심있는게 아니라 진짜 그냥 서점이 목적이였나...’ 현석은 절망했다. 사실 이 절망은 약간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투명문 너머의 그녀와 투명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너무 대조되었다. 아름다운 존재는 보석처럼 아름다웠지만 자신은 너무나 평범했다. 교복패션은 별 볼 일 없었고 이 얼굴에 사실 잘 꾸며놔도 그녀의 옆에 서있기에는 한참 부족해보였다. 혹시 그녀도 대조적인 둘의 모습을 본게 아닐까. 현석은 이럴 바에 처음부터 안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번도 여자랑 사귄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왜 하필 오늘이런 절망을 맛본건지 개탄스러워하며 돌아서려고했다. 그 때, 그녀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같이 책 구경할래? 반말해도 되지?”
“아... 네. 생각해보니까 저도 살 책이 있어서...”
‘하느님은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이건 분명 운명이야.’ 현석은 신나서 같이 들어갔다.
자신에게도 반말하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현석은 괜찮을까요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뻔했지만 좀 더 프로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에 바로 그러겠다고 했다. 하지만 버벅대는 말투는 전혀 프로답지 못했고 자신도 마음 속으로 스스로에게 할 수 있는 욕을 퍼부었다. 그런데 또 막상 서점안에 들어가니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 말도 걸지 않고 책만 이리저리 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따라다니면 아까 한 말이 거짓말이 되잖아.’ 현석도 찾는 책이 있는 것처럼, 그녀가 옆에 있든 없든 전혀 개의치 않는 것처럼 그녀와 떨어져서 책을 이리저리 뺏다넣었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그녀와 일정한 거리를 계속 유지했다. 그러다가 책 중에 그럴싸한 철학책이 보여서 똑똑해보일까 꺼냈다. 그리고 십분정도 지났으니 자신의 책은 찾았고 이제 자연스럽게 옆에 있어도 되겠지 싶어 그녀에게 다가갔다. 실제로는 2분이 채 안되었다.
“아, 찾았다.”
“무슨 책이에요? 아니, 무슨 책이야?”
“나 천주교 신자거든. 이 책 꼭 읽어보고 싶었어.”
<마리아의 신비를 풀다>라는 책이었고 현석도 읽어본 책이었다.
“저도 이 책,아니 나도 이 책 읽었어. 나도 천주교 신자거든.”
하마터면 아빠가 신부님이야라고 할뻔하다가 참아내고는 정말 좋은 책이라고 말을 이었다.
“몇 개 장은 조금 억지같기도 한데... 1장 6장 7장은 정말 최고야.”
“너도 성당 다녀? 세례명이 뭐야?”
“미카엘이야.”
“대천사 미카엘?”
“응. 누나는?”
“난 카타리나.”
같은 하느님을 믿는 것도 모잘라 이렇게 아름다운 세례명을 가진 그녀라니. 현석은 황홀했다. 심장은 기쁨의 움직임으로 요동쳤고 눈은 더 환해져 그녀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그녀를 돋보이게하거나 그녀의 주변을 꾸며주는 장식품에 불과했다. 비로소 세상이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그녀는 시계를 보더니 이제 가야겠다면서 다음에 또 볼 수 있겠냐면서 번호를 교환하자고 했다. 현석은 자신이 했어야 하지만 못했을 그 말을 그녀가 대신 해주어 너무 고마웠다. 각자 책을 계산하고 서로 번호를 주고 받았고 서점 밖으로 나와 이제 각자 갈 길을 가기로 했다.
“다음에 볼 땐 누나라고 하지마.”
“어? 그러면?”
“그냥, 내 이름 불러.”
그녀는 손을 흔들고 돌아서서 길을 떠났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저 여자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현석은 핸드폰에 저장된 그녀의 이름과 번호를 쳐다보며 행복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