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은 아침 식사 중에 아버지의 모습이 매우 초췌했음을 느꼈다. 몸이 피로한 정도가 아니라 영혼까지 너덜너덜해진 느낌이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면 힘을 내서 괜찮다고 했다가 다시 혼자 젓가락질 할 때는 아무 힘이 없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아들로서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분명 어제 구마때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이대로는 안돼.’
다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다미는 자신에게 텔레파시로 ‘뭘 봐? 어떻게 하라고?’ 말하는 듯 했다. 현석은 우선 의무교육으로 가야할 학교를 가기 위해 마을을 나섰다.
‘오늘 다미가 슬기누나와 예정이모랑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를 알아내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알 수 있을거야. 무언가 계획하고 있으면 못하게 하면 되고... 다미가 두 명을 괴롭히고 있는거라면 당장 못하게...’
현석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아버지를 위한 최후의 수단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야해. 정환이형때 사건부터 다 말해서라도.’
곽규호와 서윤숙은 마을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50대 부부였다. 마을사람들과 교류하는 법이 거의 없고 작은 잔치나 모임이 생기면 항상 둘 중 한명만 왔다. 간혹 부부가 함께 오는 날들도 있었지만 최소 한 명은 금방 돌아가버렸다. 부부는 자신들이 농사 말고도 부업으로 주식 투자와 더불어 온라인 재태크 업무를 보고 있어서 잠자는 시간 빼고는 항상 컴퓨터 앞에 있어야한다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워낙 존재감이 없다보니 그러든지말든지라는 식으로 진실도 거짓도 묻혀버린채 사는 부부였다. 마을 사람들이 진실로 믿고 있는 것은 그 부부에게는 고시공부하는 딸이 있고 딸을 위해 죽어라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었다. 노력의 보상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로 마을에서 가장 큰 소득을 얻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집은 옛날식 작은 벽돌집이었지만 마당과 창고는 마을에서 가장 컸다. 그런데 또 농사짓는 땅은 매우 작았다.
창고는 집을 지나 마당을 건너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다. 물론 시골마을이기 때문에 대충 진흙을 밟거나 농작물을 잘 피하면 창고를 향해 들어갈 수 있었지만 그들은 마을에서 가장 끝 쪽, 마을을 감싸는 산과 가장 가까이 있어 굳이 찾아가기도 귀찮은 그런 곳이였다. 마을 사람 아무도 들어가본적 없는 창고 안에서 부부는 땅에 묻을 물건을 잘게 썰고 있었다. 오전 11시에 남편의 핸드폰 문자소리가 울렸고 남편은 피묻은 장갑을 벗고 핸드폰을 열었다.
'당신 부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아내가 없는 곳에서 전화해라.'
규호는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살면서 단 한번도 자신이 하는 일을 들킬 것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불안은 스스로의 마음이 만드는 것, 규호는 늘 순탄대로일 것이라고 생각하던 인생에 이렇게 큰 걸림돌이 생길 줄 몰랐다.
‘아니야. 괜찮을거야.’
규호는 일이 끊기는 상상, 경찰에 잡혀가는 상상, 더 이상 딸에게 돈을 보내주지 못하는 상상까지 해보았는데 그런 일이 미래에 생길 것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놀래지마. 침착해.’
“잠깐 전화좀 하고올게.”
“누군데?” 아내는 썰어놓은 물건을 배양토에 넣어 섞어서 감싸기를 멈추고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무심히 물었다.
“친구.”
“친구 누구?”
“있어. 자네도 쉬고 있어.”
규호는 신경질내며 밖으로 나갔고 윤숙은 남편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수상쩍어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 누구야?”
“아저씨. 저 다미에요. 성당네 딸이요.”
“다미? 그 신부님이 데리고 사는? 너 지금 이 문자 뭐야?”
규호는 침을 튀겨가며 급한 목소리로, 작게 물었다.
“인천 조직폭력배 현무파. 그 사람들이 아저씨한테 뒷처리를 맡기는거죠?”
“너... 너... 누가 너한테 말했어?”
“그게 중요한가요? 제가 이걸 경찰에 신고하면 감옥행일텐데.”
“너 누가 어른한테! 내가 네까짓 애송이한테 겁먹을 줄 알아! 누가 말했는지 말해! 갈가리 찢어 죽여버리기 전에!”
“많이 겁먹으셨나봐요.”
다미는 거실 소파에 앉아 탁자 위 천사상을 만지며 넉넉한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까짓 애송이한테 소리 지르고 갈가리 찢어 죽여버린다고 그러고.”
“야. 너 지금 어디야? 학교도 안다니는 년이 할 짓 없어 이러냐! 내가 찾아가서 너 죽여버린다 지금.”
규호는 집문을 열고 나와 길거리에 서서 성당이 어느 쪽인지 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성당이 아니라 집에 있을텐데 집이 어딘지는 몰라서 두리번거리면서 쫓아가 죽여버리겠다는 말만 불분명하게 중얼거리듯이 말하고 있었다.
“우산빌라 604호.”
“뭐?”
다시는 못느낄 것 같은 감정을 오늘 두 번째 느낀 규호는 온몸이 경직되었다. 처음 문자를 받을 때보다 더 심각한 압박감이였다.
“따님을 갈가리 찢어죽여드릴까요?”
“워...원하는게 뭐야?”
다미는 일부러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하느님께 용서를 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