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히오는 자신의 자리 의자에 불편하게 앉아있는 정아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그 의자와 세트인 책상에 앉아 그녀를 내려보았다. 아정은 세르히오가 준 커피를 받아 손으로 감싸쥔 채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았다. 이곳에 데려온 적이 없는데 무언가 변태적인 요구가 있을까 두려웠다.
“현석이를 제물로 바쳐야겠어.”
“네? 왜요? 현석이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정은 손에 쥐던 커피잔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질문을 쏟아냈다. 초조하기는 했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화라는 감정이 솟기에 세르히오는 너무 무서웠다.
“왜 안깨지지? 신기한데.” 그가 커피잔을 들고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다미까지 제물로 바치고. 여기는 이제 정리할려고 했지. 그런데... 애가 너무 똑똑하잖아. 죽이기 아까워.”
“그게 무슨 말이에요?”
“스페인으로 보낼거야. 보스가 좋아할 것 같아. 걔 이미 스페인어도 할 줄 알잖아?”
“그럼 그냥 지금 마무리하면 되잖아요. 왜 굳이 현석이한테 그래요?”
정아는 무릎 꿇고 울면서 빌었다.
“우리 현석이 살려주세요. 제발요. 제가 앞으로 더 잘할게요.”
“정아씨는 늘 잘하지. 하지만 어떻게 하겠어? 우리에게도 돈이 필요한 것을.”
정아는 알고 있었다.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는 의식을 치른 뒤 시체가 인신매매조직에게 거래된다는 것을. 세르히오는 웃으며 스페인말로 말했다.
“예뻐서 데리고 있을려고 했는데.”
정아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지의 말로 인해 더 불안했다. 손을 더 빠르고 열이 날만큼 빌면서 그녀는 자신의 뿜어져나오는 눈물을 보여줬다. 그런 그녀에게 보이는 것은 이마를 향해 조준된 권총이었다.
“어쩔 수 없다. 그동안 고마웠어. 이별은 아쉽지. 그래서 아름다운거야.”
“자... 잠깐만요! 할 말 있어요. 할 말.”
정아가 권총을 손으로 잡고 급하게 말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세르히오는 손으로 이마를 치며 즐겁게 웃었다. 룸 바깥에서 유리벽을 통해 보고 있는 수녀 2명도 웃고 있었다.
“어어, 말해. 세상 마지막 말인데. 들어줘야지.”
“다미가... 저한테 말했어요. 탈출하자고.”
“뭐? 다미가?”
다미라면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세르히오는 아까와는 다르게 표정이 완전히 심각해졌다.
“자세히 말해봐.”
“그러면 다미를 제물로 바치고 현석이와 그 엄마는 어떻게 하나요?”
“제가 스페인으로 데려갈거에요.”
수녀가 인상을 쓰며 세르히오를 쳐다봤다. ‘꼭 저런 변태들이 일을 그르치던데.’
“그것 때문에 뭐가 잘못될 것 같아요?”
인상을 썼던 수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인상은 세르히오에게 옮겨갔다. 둘 사이의 신경전에서 다른 수녀가 눈치를 보며
“에이, 괜찮겠죠.”라고 웃으며 말하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해보려고 했다.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었지만 세르히오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다.
“지금까지 무언가 잘못된 일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다미 아빠는 어떻게 하죠? 왜 처음부터 죽이지 않은거에요?”
그리고 아까 수녀는 다시 분위기를 매섭게 만들었다.
“파면당한 신부에요. 전에도 말했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저희에게 올 가능성이 커지죠.”
“10년 가까이 구마 훈련을 받은 사람이 악마를 숭배하게 될까요? 게다가 우리로 인해 자기 딸이 죽었는데?”
“내가 말하면 들을 겁니다. 조잡한 합성동영상도 믿는 사람인걸요.”
“그거랑 이건 다르죠. 조아담 그 사람이 그 동영상을 믿은 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였지만 애초에 근본적으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떻게 악마를 믿게 할 수 있는데요?”
오늘따라 이리저리 따지고 드는게 귀찮게 느껴졌지만 세르히오는 대답하는 재미도 느끼고 있었기에 참자는 마음으로 나름 친절하게 대답했다.
“그 동영상의 돼지가 지금의 나로 이렇게 변할 수 있었음은 악마의 힘이였다고 하면 되죠. 그 인간은 분명히 믿을걸요.”
“만약 안믿으면요? 그때가서 죽일건가요?”
“뭐, 그렇죠.” 그는 입꼬리를 당기고 고개를 까딱 제스처 취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분명 믿을 겁니다. 자식이 악마에게 바쳐졌잖아요.”
수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세르히오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손을 모은 다음 그 위로 얼굴을 받치며 말했다.
“포르투갈의 한 아이를 유괴해서 제물로 바쳤어요. 그런데 어쩌다보니 꼬리가 밟혀 그 아이의 부모에게 노출되어버렸어요. 그 부모는 지금 스페인 본당에 있어요. 루시퍼의 가장 충성스러운 일꾼이 되었죠.”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였고 말싸움을 계속 하던 수녀도 거짓말임을 느꼈다. 하지만 더 따져봐야 의미없는 싸움만 날게 자명했다.
“알았어요.”
“안되면 죽일게요.”
세르히오도 속에 없는 말을 그렇게 해주는 호의를 베풀었다.
토요일 저녁 미사가 시작되었다. 수녀 7명과 세르히오, 정아와 현석, 다미, 11명이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다미와 현석은 제일 앞줄에서 오른쪽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중 다미가 중앙통로에 가장 가깝게 앉은 상태였다. 제일 뒤에 앉은 세르히오는 자신의 양복 옷깃을 정리하며 계속 다미를 쳐다보았다. 다미의 뒤통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사랑스러웠다.
‘죽이기 너무 아까운데. 어쩔 수 없지.’
미사가 중반부가 넘어가며 그리스도의 육체를 받아 먹는 성체성사 시간이 되었다. 다미 옆에 앉아있던 정아가 다미에게 일어나서 신부님께 가라고 그녀의 오른쪽 팔을 툭툭 쳤다. 왼쪽 편에 앉은 수녀님들도 다미를 쳐다보고 있었다. 원래 왼쪽편에 사람들이 먼저 성체성사를 위해 일어나 줄을 섰었다. 그런데 오늘은 다미를 제일 앞에 보내기 위해 오른편 사람들부터 줄을 서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아도 그걸 알고 다미에게 나가라고 한 것이었다.
다미는 왼쪽 수녀들이 가만히 앉아서 자신만 바라보는걸 확인하고나서 곧바로 정아를 째려봤다.
증오, 원망, 배신감, 경멸, 살인욕구 모든 것이 다미의 눈에 가득 차 있었다.
정아는 손짓을 그만두고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봤다.
“야, 빨리 가.” 현석이 다미를 재촉했다.
다미는 엉덩이를 드는 듯 하더니 곧바로 중앙길로 뛰어 출구로 달려나갔다. 그 때 세르히오가 일어나 달려오는 다미의 목을 한 손으로 잡아 졸라 그대로 들어올렸다. 나머지 한 손은 주머니에 낀채로 고통스러워함과 동시에 죽여버리겠다는 식의 눈빛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다미를 올려보았다.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황홀감에 빠져있었다.
정아는 현석을 품에 안아 이 광경을 보지 못하게 했고 다미는 곧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