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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Sep 08. 2020

호의를 감당해야 하는 세상

[넷플릭스] 마담 싸이코


마담 싸이코
스토리

알바가 끝나고 집에 가던 프랜시스. 지하철에서 우연히 가방 하나를 줍게 된다.

같이 사는 친구 에리카는 온갖 범죄가 들끓는 뉴욕에서 굳이 주인에게 가방을 찾아준다는 프랜시스를 극구 말린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기어코 가방 주인의 집을 찾아가게 되는데...

얼굴에 무지개 ㅈㅅ;;;


호의를 감당해야 하는 세상
숨은 의미 찾기

일단 한 줄로 내 기분을 이야기하자면, 영화 시작부터 '나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을 행하는 주인공 덕분에머리채가 잡힌 채로 2시간 내내 고구마를 강제로 먹는 기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 심야영화로 보려다가 '애나벨-집으로' 봤었다. 그래서 엄청 실망했었는데, 이거 봤으면 두 배로 실망했을 각.


이 영화가 시작된 원인인 프랜시스의 친절.

"굳이" 그 큰 도시에서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으로 가방을 찾아다 주겠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친절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분실물 센터가 닫혀있으면 다음 날 출근할 때 갖다 주든가, 아님 그 앞에 두고 가든가, 하다 못해 경찰서에 갖다 주든가. 굳이 본인이 갖다주지 않아도 방법은 많다.

물론 안다. 실제로는 이 말도 안 되는 행위를 하는 말도 안 되게 착한 사람들이 있다는 걸. 그렇기에 이 영화가 성립이 되는 거겠지. 그레타가 원하는 사람은 그런 말도 안 되는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었을 테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이 행동에도 이유를 부여하긴 했다. 프랜시스가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그리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레타의 신분증을 보고 선뜻 찾아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겠지. 만약 가방 속 신분증이 중년 여성의 것이 아니었어도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며 가방을 가져다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그 이후에는 고구마의 연속이다.

위험함을 감지하고 거리를 두려는 시도까지는 이해했다. 그런데 실제로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순간이 있었음에도, 주소를 바꾸거나 핸드폰 번호를 바꾸는 행동따위 쿨하게 하지 않는다. 나라면 그 집을 나서자마자 폰 번호부터 바꿨을 것이다. 게다가 내가 일하는 곳을 알고 줄곧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서 계속 알바하는 여유 무엇?

이런 비합리적인 선택을 강행하는 프랜시스의 모습을 보며 분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짜증도 났고, '이 영화 뭐 이래?' 싶었다. 그런데 솔직히 감정적으로만 접근했을 때, 그녀의 심정을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고작 그런 사람 때문에 내 일상에 불편함을 초래하는 게 싫은 것이다. 잘 유지되고 있던 나의 일상들을 바꾸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사람만 얌전히 내 일상에서 빠져주길" 바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자신이 베푼 "호의"에 대한 감당 마저도 자신이 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뼈져리게 다가왔다. 그런 세상 속에서 살고 있구나, 나는, 우리는.


그 외에도 아쉬운 장면이 많았다.

먼저 쇼팽의 음악을 틀어놓고 현란한 발재간으로 춤을 추면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다. 연출적으로는 미쳤다고 생각하나, 이 장면을 위해 필요없는 등장인물을 넣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단순히 그레타의 사이코적 캐릭터를 도드라지게 하고 싶었던 감독의 욕심을 덜어내지 못해 만들어진 훌륭하지만 끔찍한 혼종이랄까.

두 번째로는 프랜시스가 손가락을 박살내는 장면. 이 장면은 탈출도 못하고, 괜히 손발까지 다 묶여버리는 미친 고구마를 선사한다. 이전 희생자를 지하실에서 발견하면서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나 했는데, 그냥 그게 끝이었다. 이마저도 그레타가 마취약을 주사하는 장면을 위해 생긴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서 좀 빡쳤다.

분명 이런 장면도 무서웠지만, 나는 가장 그레타가 무섭게 느껴진 장면을 말하라면 바로 레스토랑 씬을 꼽겠다.

그레타가 어긋난 모성애를 들먹이며 광기어린 집착을 보여주는 순간, 내면의 모든 것이 폭발하다 못해 좌절스러운 기분이었다. 한창 자신을 프랜시스에 대입해서 몰입감이 절정에 다다르는 중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여기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히는 듯한 좌절감이었다.

"정말 정신병원에 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정신병원에 온다."

그 순간, 이 말이 생각난 게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대체 자신에 대해 어디까지 열고, 어디까지 닫고 살아야 하는 걸까,

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자신을 지키는 법
감상평

사실 한창 영화에 몰입하면서 프랜시스에게서 어린 날의 나를 발견했다.


프랜시스는 딸과 멀리 떨어져 지내서 외로워하는 그레타를 보며, 엄마를 잃고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초반에는 오히려 프랜시스가 그레타를 챙겨주려 하는 든든한 딸의 모습이 많이 나온다. 프랜시스에게 엄마란 지켜주어야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모양이다.

이 지점에서 프랜시스는 아직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마치 자신이 그레타를 감싸안아주는 양 다가가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그레타를 챙김으로서 프랜시스 자신이 위로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의 외로움을 자신이 채워준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거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꼰대가 생기는 게 아닐까 싶기도.

자꾸 무지개...미안해요 클씨....;;

현대사회의 대부분이 의외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지키는 법을 잘 모른다.

나에게 있어 이건 "자기 방어"와는 다른 개념으로 이해가 된다. 자신의 감정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왜 시작되었는지, 해소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걸 말한다. 물론 나도 잘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제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그 잘못된 방향이란 것이 바로 프랜시스의 행동 같은 것들.

친절을 베푸는 행동을 말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해소하지 못한 감정을 남에게 떠넘기는 듯한 행동을 의미한다. 짜증을 내고 화를 내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오버하면서 즐거운 척을 하거나. 방법은 여러 가지인데, 프랜시스의 경우 망상에 해당하지 않나 싶다.

"저 여자는 외로워. 저 여자를 내가 돌봐줘야 해."

그래서 오히려 나는 프랜시스를 보며 '함부로 친절을 베풀 수도 없는 사회에 대한 회의감'보다,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자가 친절을 베풀었을 때'를 봤던 것 같다.




이 영화의 정말 잔인한 점은 마지막에 에리카가 프랜시스를 구출함으로서 일말의 희망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영화는 내내 우리에게 경계하라고 말한다. 함부로 친절했을 때,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한다고 말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에리카는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직 친구를 구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레타의 가방을 찾아 오랜 시간 지하철을 타고 돌아다닌다. 지하철은 물론 버스도 타지 않는 에리카가.

이런 에리카의 진한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은 삐뚤어진 그레타의 집착과 비교된다. 에리카를 보면 끊임없이 경계하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 속에도 우리 옆에 남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지도 못하게 만든다. 엉거주춤, 문밖에 한 쪽 발을 내민 채로 세상을 힐끔거리게 만든다.

'나'와 '너'의 경계에서, 오늘도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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