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트위스트] 리뷰
올리버 트위스트
줄거리
올리버 트위스트, 그의 인생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은 아이만이 아니다
숨은 의미 찾기
책 속에는 당시 영국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다만 고풍스러운 건축물이나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족들의 이야기는 아니다. 올리버 트위스트가 배회하는 거리는 어둡고 더러운 뒷골목이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고,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찰스 디킨스만큼은 예외였다. 그는 살아있을 때 주목을 받은 유명한 작가이지만, 늘 자신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제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낼 줄 아는 용기와 유머감각이 있는 작가였다.
아이는 정말 불완전한 존재일까?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가장 눈길이 갔던 건 '아이를 대하는 어른들의 태도'였다. 어떤 어른은 아이를 이용하고, 착취고, 굶기고, 심하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어떤 어른은 친절하고 착하고 보살펴주려 애쓰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대체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아마 '아이는 불완전하다'라는 생각일 것이다. 전자는 '아이가 불완전하니 내가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후자는 '아이가 불완전하니 돌봐주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따지자면 후자는 나쁜 게 아니긴 하다. 어쨌든 그것은 불완전한 누군가를 품어주고 사랑하는 행위이니까. 문제는 전자다. 오만하게 자신이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기의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은 아동학대를 저지른다. 그리고 이런 아동학대는 200년 전, 아니 그 이전부터 여전히 인간 사회의 전통처럼 여겨지고 있다. 최근에 자녀를 학대하거나 심지어는 죽이는 부모들에 대한 뉴스를 종종 발견한다. 사실 이미 많은 아동들이 그렇게 방치되고 죽어갔겠지. 이제야 조명되는 것뿐.
난 이런 어른들의 생각에 묻고 싶다. 어른은 완전하냐고.
모든 어른은 아이였다. 불완전한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된다. 그렇다면 어른은 완전한 것인가? 이 세상에 완전하고 완벽한 어른이 존재는 하나? 아니,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기는 하나? 대체 무슨 잣대와 기준으로 어른들은 아이가 불완전하다고 낙인찍는 것일까. 자신도 불완전한 주제에.
그러므로 인간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어른은 아이를 배려해야 한다. 그들보다 조금 더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가 만든 사회에. 그렇지 않은가. 아이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혹은 만들어놓은 사회에 들어온 구성원이다. 그러므로 배려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그들이 모르는 것을 악용해 배려 대신 어른의 권력을 휘두르는 건 비겁한 짓이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이 어릴 적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노동 착취를 당했던 것을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어떤 사회든지 발전의 계기가 되는 곳은 찬란하고 화려한 곳이 아닌, 바로 이 뒷골목이다. 그리고 예술은 그것을 외면해선 안 된다. 더럽고 추악한 사회의 골목골목을 뒤져서 문제를 기어코 말해야만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사명이다.
사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그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것. 비틀거려도 꾸역꾸역 한 걸음씩 내디뎌야 한다. 그렇게 대중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러나 그게 늘 암울하고 슬플 필요는 없다. 난 내 방식대로 걸어갈 테지만, 적어도 포기는 안 할 것이다.
해피엔딩은 진리다
감상평
200년 전 영국에서 쓰인 소설에서 나는 내가 소설을 쓸 때 꼭 기억해야 할 것을 배운다.
예전에는 열린 결말, 슬픈 결말이 마치 멋진 문학의 정점인 줄로만 알았다. 그렇기 위해 나는 온 소설의 마디마디에 슬픔과 우울함을 끼워 넣었다. 슬픈 결말에 합당한 궤도와 흔적으로 타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그러나 내가 문예창작과에서 나오고 깨달은 것은, 대부분 독자들이 작가 의도나 예술적 감각 따위와 상관없이 '해피엔딩'을 바란다는 것이다.
"왜 해피엔딩 어이야 하는가? 왜 권선징악이어야 하는가?"
나는 작가이기 전에 독자이다.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내내 이 불쌍하고 작은 아이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올리버가 거리에서 굶주린 배를 움켜잡고 있을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고, 도둑 소굴에 다시 붙잡혀 갈 때는 나 역시도 눈물이 났다. 불행해지려는 것을 내가 먼저 눈치채는 부분에서는 안 들릴 걸 알면서도 "안 돼!"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작가는 결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건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꼭 슬프고 암울하고 현실적일 필요는 없다. 표현 방식은 다양하고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현실에 대한 위로를 바라니까. 그러니까 독자가 원하는 건 불행하고 암울한 현실이 아닌, 그에 대한 위로다.
독자에게 필요한 건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나도 이제는 그런 희망을 쓰고 싶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