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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Sep 20. 2020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

소설책 [인어가 잠든 집]리뷰

인어가 잠든 집_줄거리

  가즈마사와 가오루코는 아이들 앞에서만 사이좋은 부부인 척 하는 '쇼윈도 부부' 이다. 별거 중이던 그들은 어느 날, 딸인 미즈호의 초등학교 입학 면접을 위해 만난다. 그러나 그 날, 그들의 인생에 있어서는 안 될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만다.


  할머니를 따라 수영장에 갔던 미즈호가 물에 빠져서 의식을 잃은 것이다. 의사는 미즈호가 뇌사한 것이나 다름 없다며 절차대로 장기의식 여부를 묻는다. 부부는 미즈호가 착한 아이였음을 떠올리며 장기의식을 결심한다.


  하지만 뇌사 판정 직전, 미즈호의 손을 잡고 있던 가오루코는 아이의 손이 움직였다며 장기의식을 거부한다. 그 이후 그녀는 미즈호의 간병을 시작하게 되는데...



사람은 언제 죽는가?_소설 추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리적으로 접근한다면 몸의 일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심장이 뛰지 않는 것일테고. 조금 더 감상적으로 접근한다면 누군가를 추모하고 그를 그리워하며 떠나보내는 것일테다. 물리적 죽음, 사회적 죽음. 대략 우리가 정의하는 죽음은 그렇다.


  하지만 미즈호의 경우처럼 '뇌사'는 어떨까? 뇌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스스로 숨은 쉴 수 없지만, 심장은 아직 뛰고 있을 때. 이 사람은 살아있다고 해야할까, 죽었다고 해야할까? 소설 속에서 미즈호는 인공호흡기 없이 숨을 쉬는 것처럼 보이고, 근육으로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심장은 뛰지만 스스로 호흡하고 움직이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죽은 것일까? 가오루코는 칼을 들고 미즈호에게 겨누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지금 제가 이 아이를 죽이면 살인이 아닌가요?"




  16살, 겨울방학을 앞둔 12월이었다.

  집에서 엄마의 전화를 받고 펑펑 울었다. 위독한 상황이었던 외할아버지가 결국 돌아가시고 말았다. 처음엔 그저 슬펐을 뿐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내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당연한 존재'였다. 늘 방문을 열면 있었고, 언제든지 대화할 수 있었고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것들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실감했다.

  1년 정도는 할아버지를 자주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 모두가 할아버지가 없는 삶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할머니 댁에 가도 할아버지 사진을 찾아가 인사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할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은 모두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나의 입장만 나열한 것이다. 나는 궁금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떤 마음이셨을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 그 영혼은 지금 어디에 있을지, 혹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 내가 모르는 누군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모를 것이다.


  이 소설은 미즈호가 죽었냐, 살았냐를 묻는 게 아니다. 남은 사람들이 미즈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각자의 방식을 보여줄 뿐.

  나 같은 경우에는 미즈호의 죽음을 일찍이 받아들였다. 소설 초반에 부부가 장기기증을 고민하며 대화를 나눌 때에는 눈물이 나며 미즈호가 죽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제목처럼 그녀는 '인어'다. 인어가 헤엄을 치지 못하면 죽는다. 그녀는 스스로 걸을 수 없다. 앞으로 헤엄쳐 나갈 수 없는 인어는 죽은 것이다.

  이렇듯 미즈호의 주변 사람들은 어느덧 하나 둘 미즈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기기에 의존하며 그저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를 살았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즈호와 새로운 추억을 쌓을 수 없고, 과거에 알고 있던 미즈호를 추억할 수 밖에 없다. 그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게 아니다.

  소설에서는 가오루코가 미즈호와 대화한 것으로 나왔지만, 그것은 아마 엄마 나름대로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자신은 딸에게 최선을 다했고, 딸도 그것을 알아줄 것이라는 믿음. 딸은 더 이상 아프지 않고 행복하고 편안할 것이라는 믿음.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그런 믿음 뿐이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는 데 굉장한 시간이 걸렸다. 소설은 단숨에 읽었지만 작가의 질문에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누가 그 때를 정하는가'라는 소제목 뒤에는 미즈호가 죽은 때를 두고 싸우는 가오루코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이 죽는 때는 언제인가에 대한 내 대답은 '죽은 당사자만이 스스로 그 때를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죽음도 어떤 한 사람이 받아들이는 일종의 경험이다. 모든 인간이 단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다. 경험한 후에는 어땠는지 다른 사람에게 말해 줄 수도 없다. 영혼이 이미 육체에서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가오루코와 미즈호가 대화하는 장면은 엄마가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이기도 하면서, 미즈호가 스스로 죽음을 인정한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미즈호는 네잎클로버를 발견한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대'라는 엄마의 말에 네잎클로버를 두고 가자던 미즈호는, '나는 이미 행복하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남겨둘래'라고 말한다.

  이 네잎클로버 에피소드는 미즈호가 결국 엄마 곁을 떠나는 장면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엄마 덕분에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에, 소고에게 네잎클로버처럼 심장기증이라는 행운을 남기고 떠난 것이 아닐까. 미즈호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미즈호의 모습을 보면서 죽음을 경험한 영혼만이 자신이 죽은 때를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추리소설 안 쓰는 추리작가_감상평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온갖 장르를 잡아먹던 히가시노가 이제는 살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놀라운 일은 아니다. 왜 사람이 죽는지, 사람은 왜 사람을 죽이는지에 대한 고민이 인간 자체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마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부터인 것 같다. 작가는 추리하는 방식이 아니어도 자신의 고민과 철학을 풀어낼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덕분에 화려한 추리기법은 볼 수 없게 됐지만, 훨씬 더 걸쭉하고 진한 국물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쓰기 위해 엄청나게 고민했다. 무슨 답을 원하는 것인지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맸지만, 그건 바보같은 짓이었다. 애초에 답이란 없다. 한 명의 사람은 하나의 우주다. 우주는 무궁무진하고 아직도 알아내지 못한 것 천지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에 대한 질문에 완벽한 답을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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