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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Aug 02. 2021

수치심이라는 병에는 공감이라는 약을

[수치심 권하는 사회] 리뷰

수치심 권하는 사회
줄거리
“수치스럽게 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는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수치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저자는 현대 사회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수치심을 강요하는지,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수치심에 시달리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자신이 만난 수많은 사람들, 그들과 나눈 이야기에서 수치심이 인간의 삶에 어떻게 파고들어, 어떻게 한 개인을 파괴하는지에 대한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수치심은 결코 우리의 인생을 바꿀 수 없다. 수치심에서 벗어나야 변할 수 있다.


수치심이라는 병에는 공감이라는 약을
열린 의미 찾기

‘숨은 의미 찾기’라는 것은 이 책의 취지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저자는 수치심을 이겨내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숨기지 말고 뱉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숨기고, 개인의 문제로 병리화 시켰을 때 수치심은 미친 듯이 번식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글에서만큼은 ‘숨은 의미’가 아닌 ‘열린 의미’라는 말을 쓰고 싶다.


우리는 수치심에 대해 잘 모른다.

일상생활에서조차 ‘수치스럽다’는 단어 자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체로 ‘수치’라는 단어를 사용할만한 상황에서 이미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치심을 느끼면 우리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려 애쓴다. 그래서 자신이 수치심을 느꼈다고 인지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아니, 어쩌면 거의 없다.

여기에서 ‘수치심’이라는 감정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도 몇 없을 것이다. 수치심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준 이도, 배운 이도 없기 때문이리라.

대체로 사람들이 ‘수치심’과 가장 크게 혼동하는 것은 ‘죄책감’이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중

같은 행동을 두고도 죄책감과 수치심은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진에서 나와있듯이 죄책감은 ‘나는 나쁜 짓을 했다’는 생각으로, 수치심은 ‘나는 나쁘다’라는 생각으로 치환된다. 죄책감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변화할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수치심은 자신에 대한 신뢰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가능성도 내포할 수 없다.

죄책감으로 위장한 수치심을 타인에게 발포할 때, 우리는 ‘굴욕감’을 자주 사용한다. 글의 가장 첫머리에 쓴 문장, “수치스럽게 하거나 무시하는 방법으로는 아이들의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를 읽어보라. 죄책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인식이라면 굴욕감은 타인의 행동에 대한 감정이다.

“다 너 잘 되라고 그런 거야.”

굴욕감으로 위장한 수치심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이다. 때로 우리는 타인에 의해 공개적으로 창피를 당하는 일이 생긴다. 그것이 실제건 아니건, 그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이것이 무례한 행위라서 화가 나는 게 아닌, ‘내놓고 싶지 않은 내가 까발려졌다’고 생각해서 화가 날 때, 수치심을 느낀다.


죄책감과 굴욕감으로 위장한 수치심,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내가 인식하고 있던 모든 것들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것이다.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이 아닌 수치심을 느꼈거나, 타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일을 단순히 굴욕감으로 포장해 행동했던 일들.

누구에게나 그런 경험은 있을 수밖에 없다.

수치심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솔직하게 이야기할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용기를 낸 이에게 우리가 보여야 할 마땅한 태도, 공감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감을 주고받는 일은 쉽지 않다. 수치심은 다른 것과 혼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공감은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는 데에서 문제가 시작된다.


"너의 문제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해. 하지만 나는 너와 달라."
"너는 나를 이해 못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네가 뭘 알겠어."

때때로 우리는 공감하기 귀찮아서 동정을 던지곤 한다. 또한 누군가는 공감이 아닌 동정을 원할 때도 있다. 동정이란 상대와 나 사이에 선을 긋는 행위다. 동정을 하는 사람은 상대의 문제에 관심이 없고 상대에게 일어난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동정을 원하는 사람은 청자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불평을 털어놓는데, 이를 두고 우리는 '감정 쓰레기통'이라고 부르곤 한다.

동정이 오가는 사이에는 진실된 대화와 공감의 언어가 형성되기 어렵다.

"너는 그래도 낫지, 나는 심지어 이렇다니까."

가장 최악의 수는 ‘더 강력한 패 내밀기’다. 이건 동정을 원하는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주로 하는 행위다. 종종 이걸 ‘불행 배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동정을 원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면 이런 대화방식이 주를 이룬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중

제대로 된 공감 언어를 위해서는 상대의 문제에 집중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감이 어려운 이유상대와 나에게 교집합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상대의 문제를 나의 것으로 가져와 동일시하거나, 둘 중 하나 때문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동정이나 더 강력한 패 내밀기 방식으로 나타난다.

힘든 이야기를 꺼내는 이는 충분한 용기를 내어서 솔직하게 자기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그걸 듣는 사람은 그저 진지하게 들어주고, 그가 얼마나 힘들 것인지 상황을 바라보면 된다. 제대로 이야기를 들었다면 ‘진짜 힘들었겠다, 지금은 좀 어때?’라는 말이 나오지, ‘나였다면 그런 거 못 했어’라든가, ‘너는 그래도 좀 낫다’라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책은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방법을 알려주고자 한다. 사회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수치심에 노출된다. 그러나 자신이 수치심을 느낀다는 걸 알고, 왜 그런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게 된다면 ‘수치심 회복탄력성’에 의해 우리는 수치심으로부터 덜 괴로울 수도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앞서 소개한 것과 같이 수치심을 구별할 수 있는 인식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법을 깨우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용기와 유대감을 갖는 것이다.

잠깐 동안이라도 나를 돌아보자.

자신의 삶에 깊숙이 파고든 수치심을 꺼내어보고, 가까운 이와 건강한 대화를 나누자.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조금이나마 아픔을 덜어가며 살아가는 법일 테니까.


완벽에 대한 집착은 병이다
감상평

제목이 너무 흥미로워서 나는 처음에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속앓이를 할 거라곤 생각조차 못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 역시 수치심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수치심을 만들어내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분리’라고 소개한다. ‘내’가 아닌 ‘그들’. 나는 자존감을 끌어올리는 척하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나를 자꾸만 나누려 들었다. 그래서 내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나는 ‘완벽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 보이는 데 무척이나 집착한다.

어쩌면 글로 내 생각을 정리해서 보여주는 삶을 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어진 산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은 정제된 것이지만 본질적이기도 하고, 함축된 것이지만 설명적이기도 하다. 나는 그 안에서 ‘남들에게 공격받지 않는 글’을 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더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대학시절, 매주 돌아가면서 수업시간에 자기 글을 발표하면 학생들은 손을 들고 그 글을 ‘공격’했다. 그리고 교수는 그걸 ‘합평’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했다.

물론 나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요인들이 단순히 그것 하나만은 아니다. 나는 글이라는 분야 외에도 완벽을 추구해서 완벽하지 않은 나를 혐오하는 지점들이 존재함을 이제는 안다. 내가 자라오면서 겪은 경험들, 내가 보고 듣고 만났던 사람들까지.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간에 그것들은 나를 ‘완벽함’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지금의 뒤틀리고 고통받는 내가 탄생했다. 아프지 않은 척하는.


아마 몇몇 사람들은 봤겠지만, ‘완벽 저항 일기’라는 걸 두 편 정도 올리고 순식간에 지워버렸다.

저자는 책에서 ‘취약성 숙취’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수치심은 용기 내서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긴 하지만, 분명히 수치심을 말한 것으로 인해 또 다른 수치심을 겪을 수 있으며 후회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떡해, 괜히 말한 것 같아’ 이게 바로 취약성 숙취다.

나는 지독한 취약성 숙취를 앓았다. 글을 올라가 있는 내내 손톱과 입술을 물어뜯었고, 몇 명이나 읽었는지, 조회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계속 확인했다. 너무 힘들어서 못 견디겠다고 판단한 나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글을 내릴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그렇게 하라고 했고, 나는 글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글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취약성 숙취는 계속됐다. 이미 글을 읽은 사람들은? 내 가까운 사람들은? 글을 내린 것도 수치스러웠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그 지독한 숙취에서 벗어나는데 대략 일주일쯤 걸렸다.

저자는 자신이 오래도록 지켜보고 이 이야기를 해도 되겠다고 판단이 드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만 수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라고 말한다. 아마도 아직 나는 내 수치심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만큼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그게 나인 걸.


이 책은 진심으로 많은 이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특히 자신을 완벽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완벽을 추구한다. 저자는 완벽함 대신 ‘성장적인 목표’를 선택하라고 말한다.

수치심 권하는 사회 중

나 같은 경우 수치심을 느꼈다는 사실에 또 수치심을 느꼈다.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 나의 완벽성은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스로 ‘왜 수치심을 느꼈는지’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달라졌다. 전에는 이유를 알려고 하기보단, 빨리 이 수치심을 지우는 것에만 집착했다. 물론 여전히 종종 밀려오는 수치심에 괴롭고 힘들지만, 이제는 그게 무엇인지 알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차근차근 고민해본다.

그래서 이제는 ‘완벽해질 거야’ 보단
‘어제보다 더 많은 걸 할 수 있는 내가 되고 싶어’라는 생각을 한다.

수치심으로 고통받는 모든 이가 조금이나마 해방되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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