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식량부족과 폭발적인 인구수의 증가로 인해 미래사회는 1가구 1자녀를 원칙으로 하는 '아동제한법'을 시행하고 있다.
이런 시대에 절대 태어나서는 안 될 일곱 쌍둥이가 세상에 나오게 된다. 이들의 외할아버지 테렌스 셋멘은 아이들을 모두 지키기 위한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것은 '카렌 셋멘'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일곱 명이 함께 살아가는 것. 그들은 각자의 이름과 같은 요일에만 세상에 나가고, 외출해서 겪은 모든 일을 공유하며 완벽한 팀으로서 자리잡는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출근했던 '먼데이'가 연락두절이 된다. 남은 여섯 명은 혼란 속에서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려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튜스데이'마저 사라지고 집에는 정부의 비밀 요원들이 들이닥치는데...
과연 일곱 명의 그녀는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남이 모르는, 나마저도 모르는 '나'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스포를 원치 않는 분은 영화를 먼저 시청해주세요!
단순히 사회 시스템 비판적인 시각이 아니라, 다른 시각에서도 해석해보고 싶었는데, 카렌 셋멘이라는 한 명의 사람에게서 분열된 일곱 개의 자아라는 부분일 것이라는 가설이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이 반대로 가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알고 보니 일곱 명이 그저 허상일 뿐이었고 주인공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하지만 이 영화는 완전 반대의 설정으로 가버렸다. 그렇다면 기본적인 구조도 '일곱이 하나다'라는 틀에서 온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해석을 하던 도중에 새로운 국면이 드러났는데, 캐릭터마다 존재하는 이유가 다 다르다는 것이다.
<튜스데이 VS 프라이데이>
실제로 '튜스데이'는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테리'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카렌 셋멘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져 있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되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찌보면 가장 반전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약과 술에 의존하는 모습을 통해, 카렌셋멘이라는 이름에 가장 기대고 있었던 인물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자신만의 이름을 짓고, 독립했다는 점에서 가장 독보적인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그에 상반되는 것이 프라이데이다. '너희들은 괴상하고 문제도 많았지만, 난 살기 위해 너희들이 필요했지' 라는 대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녀는 카렌셋멘에게 의존적이었다. 그러나 이 가면이 사라진다면? 자신은 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희생을 택했고, 쌍둥이들의 추억을 품고 써스데이를 살렸다. 가장 평면적이면서도 일관성 있는 캐릭터다.
<선데이 & 웬즈데이>
선데이는 가장 먼저 죽는 인물이다. 그녀는 죽으면서 의미심장한 대사를 남긴다. '내가 믿는 게 뭔지 모르겠어. 내가 누군지도 모르겠어.' 이 말은 결국 세상에 던지는 의문이다. 독재자가 강요하는 '믿음'이 과연 실제하는 것일까? 더 살기 좋은 지구라는 말은 과연 진실일까? 세뇌하듯 그렇게 배워왔고, 자아를 죽여가면서 카렌 셋멘을 연기해왔지만, 이것이 의미있고 믿을만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서 쌍둥이들의 마음에 굳건하게 뿌리잡은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다. 이렇게 사는 게 의미있는지.
웬즈데이 또한 중요한 역할이다. 그녀가 건물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메인 포스터로도 만들어졌다. 요원들이 뛰어올라오던 건물의 옥상에서 웬즈데이는 용감하게 뛰어오른다. 억압되고 독재적인 사회 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하지만 도달하고자 했던 반대편 옥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요원에 의해 죽고 만다. 이는 결국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암울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장면은 메인 포스터에서도 담아냈는데, 이런 해석으로만 보면 영화 결말이 꼭 암울할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포스터에서는 한 사람만 뛰지 않는다. 건너편에서 총을 겨누고 있지만, 일곱 개의 실루엣이 차례로 뛰어가고 있다. 이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강압적이고 위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뛰어가다 보면 언젠가 분명 저 반대편에 닿을 것이고, 날 억압하는 세력을 몰아낼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그런 의미에서 웬즈데이의 죽음은 의미있고 눈물겨웠다.
< # 새터데이, # 써스데이>
우리 주변에 있는 많은 언론들이 하는 말들이 모두 진짜일까? 두 사람은 진실을 알리기 위한 역할이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지만, 선데이가 의문을 던지고 죽을 때, 옆에 붙어 있던 사람도 이 둘이었다. 의문을 품고 진실을 알아낸 것이 두 사람이란 걸 생각하면, 영 터무니없는 말은 아닌 것도 같다.
새터데이는 에드리안을 따라가 아동제한국 서버 침투에 성공한다. 그리고 써스데이는 그 서버를 바탕으로 아동제한국에 침입해서 냉동보관 시킨다던 아이를 불태워 죽이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세상에 유포한다. 동영상 촬영 장면 역시 선데이가 거리에서 아이가 잡혀가는 모습을 촬영한 것과, 똑같은 아이를 불태우는 모습을 촬영했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더불어 먼데이와 써스데이가 대립할 때, 먼데이는 하얀 진주 귀걸이를 하고있지만, 써스데이는 하얀 진주 밑에 검은 진주가 달린 귀걸이를 하고 있다는 점도 돋보인다.
<먼데이(테렌 셋멘) = 니콜렛 케이먼>
테렌 셋멘은 눈앞의 일곱 쌍둥이를 거두어 하나로 살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낸 장본인이다. 니콜렛 케이먼의 독재체재에 소심하게 저항한 셈이다. 그는 이것이 옳지 않은 방법이고, 아이들을 억압하는 방법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 일곱 명을 모두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이라는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손가락이 잘리던 날, '난 너희를 지키려는 거야'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먼데이는 이 방법을 세습하게 된다. '카렌 셋멘'으로 살기 위해서는 일곱 명 개개인의 삶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것. 그녀는 자신의 뱃 속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가족을 죽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배운 유일한 방법이었고, 그것은 케이먼이 고안한 사회시스템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먼데이는 니콜렛 케이먼과 아주 닮았다. 케이먼의 진주목걸이와 먼데이의 진주귀걸이가 보여주듯이.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세워온 계획과 세상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부정하는 것이다. 지구와 인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케이먼과, 자신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매들을 희생시킨 먼데이는 결국 같은 사람이다. '아이들은 고통받지 않았어'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잘못된 점을 끝없이 외면한다. 모든 독재자가 그렇듯이.
<먼데이 VS 써스데이>
누구보다도 가장 '카렌 셋멘'을 저주하고 증오하던 써스데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을 '카렌 셋멘'이라고 불러달라 말한다. 먼데이는 '내가 제일 먼저 태어났어, 카렌 셋멘은 언제나 내꺼였어'라는 말을 하며, 써스데이를 겨눈다.
가장 먼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먼데이지만, 가장 먼저 세상에 발을 내민 것은 써스데이였다. 처음 학교에 가던 날, 할아버지는 써스데이에게 말한다. '명심해, 넌 이 세상에 하나뿐인 카렌 셋멘이야'라고. 물론 외동딸 연기를 하란 소리였지만, 이 말은 써스데이에게 아주 크게 다가온다. '나'라는 자아를 가진 유일한 카렌 셋멘이라는 말로 와닿았던 것이다.
손가락이 잘렸던 날, 써스데이는 자신이 겪은 경험으로 '손가락이 잘린 카렌 셋멘'이 됐다. 하지만 모두가 자신 때문에 똑같이 손가락이 잘린 카렌 셋멘이 되는 모습을 보며 충격에 빠진다. 먼데이는 언니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그 고통을 느껴야 했다. 써스데이에게 카렌 셋멘을 강요당했고, 할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자신이 진짜 카렌 셋멘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앞장서서 모두에게 완벽한 카렌 셋멘의 모습을 강요했고, 욕심냈던 것이다. 내가 진짜 카렌 셋멘이어야만 한다고, 내가 유일하게 지구를 구할 사람이라던 케이먼과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이다.
써스데이는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카렌 셋멘'을 '책임질 수 있게' 되었다. 손가락이 잘리고, 잘못된 것에 저항하는 것이 자신이 생각해온 카렌 셋멘이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카렌 셋멘'이라는 한 여자의 자아를 누가 쟁취할 것인지에 대한 싸움이었다. 먼데이는 비록 잘못된 방법으로 접근했지만, 그녀의 복잡하고 미안한 감정들이 그대로 드러나서 미워할 수만은 없는 캐릭터였다.
내가 원하는 '나'
생명의 존엄성이 짓밟히고, 독재자는 언론을 통제해서 진실을 가리고 사람들을 현혹시킨다.
우리는 과연 똑같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니콜렛 케이먼 같은 독재자의 거짓말을 믿지 않을 수 있을까? 영화초반에 길거리에서 쌍둥이 여자 아이를 가족에게서 떼어내 강제로 끌고가는 장면이 있다. 사람들은 안타깝게 쳐다보긴 하지만, 그 누구도 가족을 도와주지는 못한다. 강력한 통제 아래의 군중의 심리란 그런 것이다.
또한, 먼데이가 출근할 때 검문소 앞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도 마찬가지다. 길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듣고 먼데이는 경악한다.
마지막에 니콜렛 케이먼이 체포되어 들어갈 때도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숨어 지내던 임산부들 대부분이 빈곤한 지역의 여성들이었다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부와 권력 명예를 쥐고 있는 자들도 임신했을 때 숨어지내야 했을까?
니콜렛 케이먼이 만드려는 세상은 오로지 상류층이 편하고 풍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희생된 것은 가난하다는 이유로 태어나자마자 가족들과 분리된 어린 아이들이었을 것이고. 강력한 권력자일수록, 강한 통제가 있을수록 진실을 묻히기 마련이다.
그 안에서 '나'는 자아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 독재자가 원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움직이지는 않을까? 우리는 권력자를 감시하고, 고발할 의무가 있다. 그들이 원하는 내가 아닌, '내가 원하는 나'가 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