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최근 유명 유튜버 '꽈뚜룹'이 돌연 은퇴 선언을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는 약 130만 명의 구독자를 보유한, 그야말로 대형 유튜버다. 꽈뚜룹은 유튜브를 시작할 때부터 자신이 아닌 새로운 캐릭터를 연기하며 100만 구독자를 찍는 것을 목표로 삼아왔다.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이 시점, 그는 자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다고, 이제는 자기 자신으로서 사랑받고 싶다고 고백했다. 앞으로는 '장지수'라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채널을 운영하겠다고 선언했다.
기믹 열풍이 불고 있다.
본래 '속임수'라는 의미를 가진 이 단어는 힙합씬에서 래퍼들이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어떻게 보면 '부캐'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 흥미를 이끌어낼 만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또 다른 자아를 보여줌으로써 인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믹이 활성화되는 시점에 꽈뚜룹은 왜 은퇴를 했을까. 그의 은퇴는 어떤 의미일까. 그는 왜 이토록 유용한 돈벌이 수단이자, 자신을 정점으로 끌어올린 영리한 캐릭터를 더 이상 연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을까.
"24시간, 365일을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니까
제 삶을 조금씩 잃어가더라고요."
장지수는 5년간 유튜브를 하며 자신은 사라지고 꽈뚜룹만 남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결국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가 점점 자기 자신이 되어버리고, 진짜 자아는 누구인지 헷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괴리감이 커지는 와중에도 이 배역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까 봐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나로 하여금 지난날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글이 쓰고 싶었다. 매일같이 일어나 무언가를 손가락 끝으로 배설해내는 반복된 행위를 뒷받침하는 단 하나의 심지는 그것이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레 욕망이 생겼다. 보다 유명해지고 싶고, 보다 많은 돈을 벌고 싶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딱히 특별한 인생을 살지도 않았으므로 눈에 띄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는 점점 '내가 아닌 나'를 나도 모르게 연기하기 시작했다.
작가로서의 내 모습은 완벽해야 했다. 나는 유려한 인생 곡선을 그리면서도 우아하게 착지할 줄 아는 예리한 젊은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써내며 결국 언젠가 빛을 보는 작가 따위를 연기해보려 했다. 그 발버둥은 초라한 작가 지망생의 본모습을 덮으려는 시도였을 수도 있고, 성공했을 때를 대비한 큰 그림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나는 진짜 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아우성을 차단했다. 그렇게 몇 년을 지냈다.
한계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닥쳐왔다. 아니, 어쩌면 가장 먼저 예상했어야 하는 시련이었다.
나는 글쓰기가 재미없어졌다.
괴롭고 지겨웠다. 긴긴 나날들을 내가 아닌 척 지내고 나니 내가 써온 것들은 과연 진실이었는지 의문스러웠다. 물론 내내 거짓말만 한 것은 아닐지라도, 대부분의 나는 매끄러운 표면만을 보여주려고 수없이 나를 사포로 갈아내었다. 퍽이나 따가웠다.
그러는 와중에 우습게도 자신을 표출하고 싶은 이중적인 욕망이 솟구쳤다. 포장된 완벽과 진실된 초라함, 두 욕망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분리된 채 나의 앵글에서 벗어났다. 카메라를 쥐고 있던 나는 당최 렌즈를 어디에 들이대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글을 쓰고 싶긴 했지만, 여태껏 '그냥'이라는 욕망만은 외면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냥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괴로워했다.
나는 내면의 갈등이 결과물로 표출되는 긴 물음을 계속 미뤄두었다. 하지만 나를 향한 질문들이 쌓이고 쌓이니 마음의 창고가 꽉 들이찼고,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나는 솔직한 심정을 하나씩 꺼내면서 다시 '그냥' 써보기로 했다. 그 글은 결국 '이번 생은 글렀나'라는 브런치 북이 되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알려지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보다도 이젠 내가 아닌 모습을 연기할 배짱이 없다. 게다가 한 번 고백했다고 이제 고백이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내가 나인 걸 숨길 필요가 있나? 그냥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기믹은 영리한 스토리텔링이라고들 한다.
그럼에도 내가 답답할 정도로 솔직함을 고수하기로 맘먹은 것은, 내가 아닌 나로 올라선 자리가 과연 행복할지에 대한 의문 때문이다. 그걸 유지하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들까. 더불어 그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 나는 나이게 될까? 온전한 나 그대로 남을 수 있게 되는 걸까? 또 다른 내가 되어 다른 무대를 올라야 하진 않을까? 그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보일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만다.
기믹은 결국 종말 할 것이다.
스스로의 영리함 때문에.
물론 그런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픈 순간들이 올 것이란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더불어 사람들은 이 게임을 즐기지만 결국 질리고 말 것이란 사실 또한. 반대로 솔직한 것은 오글거리고 촌스럽지만 오래도록 남는다. 허상처럼 붕붕 뜨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휘청거리는 종이를 묵직하게 눌러주는 누름돌처럼, 그 자리를 지킨다.
나는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기 전에,
멍청한 고백으로 그 허물을 벗어던지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