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작가 생존기
대학에서 내가 무얼 배웠는지 알고 싶다면 첫 수업과 마지막 수업에서의 자신을 떠올리면 된다.
중요한 건 무엇을 배우고 있었는지가 아니다. 수업 내용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중요한 것이지. 처음 설레이고 기대하던 마음으로 수업을 듣는 신입생과 과제, 시험, 취준에 찌든 졸업생의 수업 태도는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나, 수업에 임하는 자세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변화했는가에 대한 척도가 된다.
내가 가장 기대했던 수업은 소설창작 시간이었다. 소설가가 되겠다는 생각 하나로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던 내게는 단연 소설 창작이 메인수업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전환하는 두 세번의 강의 끝에 소설 발표시간이 돌아왔다. 교수님은 소설을 발표한 학생을 가운데 앉히고 수업을 시작했다.
분명 수업 시작 전에는 다른 학생들이 부끄러워하는 소설 발표자에게 칭찬을 건네기도 하는 등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 약 두 시간 동안 우리는 공포에 떨었다. 학생들이 더듬거리며 자기 생각을 말하면 교수님은 무슨 말이든 비난조로 치환해서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수업이 끝나고 가장 두려움에 떨었던 것은 다음 주 소설 발표자였다. 안 좋은 점만 콕콕 집어내는 혹독한 평가에 발표자가 물어뜯기는 걸 눈앞에서 보았으니 다음주가 어찌 두렵지 않으랴. 자신도 저 꼴이 날 텐데.
나는 크게 세 종류의 글을 쓴다. 소설, 에세이, 평론.
그 중에서도 평론은 내게 온라인 플랫폼의 길을 열어준 글이다. 블로그에 평론을 올리다가 브런치도 알게 되었고, 실제로 브런치에 합격할 수 있었던 것도 평론 덕분이었다. 지금은 브런치에 에세이만 업로드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평론도 꾸준히 올렸다.
난생 처음 블로그에 올렸던 리뷰를 아직도 기억한다. '스윙걸즈'라는 일본영화를 보고 쓴 글이다.
학생 때 재밌게 봤던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니 새롭게 느끼는 것이 많았다. 특히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상징이나 메세지를 잡아내는 능력이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문예창작과 학생이다보니 여러 예술작품에 대한 평론을 쓰는 과제를 매일같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주절거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찰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방치된 블로그에 올려보면 어떨까?'
초반에 리뷰를 쓸 때는 공부와 공유의 목적이 컸다. 예술 작품을 읽는 눈을 키우고, 좋은 점을 찾아내 나의 글에도 적용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작품에서 이런 것도 느꼈어!' 라는 생각을 굉장히 자랑하고 싶기도 했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 올린 글에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드는 리뷰라는 댓글이 달렸을 땐 너무 기뻤다.
그 이후로도 열심히 예술작품에 대해 분석하고 풀어내서 글을 썼다. '숨은 의미 찾기'라는 제목도 내가 작품에 숨겨진 뜻과 의미를 다 찾아내겠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사람들이 놓치기 쉬운 의미들을 찾아내서 알려주겠다는 것은, 어쩌면 남들이 보기엔 패기로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 작용 때문인걸까. 나는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작품에도 마구 딴지를 걸었다. 그렇다고 이유없이 비난만 한 건 아니다. 내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지점을 아주 상세한 이유와 함께 짚어냈다. 누구든 내 말에 반박할 수 없게 이중 삼중으로 글에 방어막을 쳐야 했다.
"내가 느끼는 걸 너도 그렇게 느껴야 해!"
그렇게 쓰다보니 점점 리뷰는 공부나 공유가 아닌 설득이 목적이 되어갔다. 나는 어느 새에 나도 모르게 방구석 평론가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생각하고 해석한 게 전부 맞는데, 사람들은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한 때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긍정적인 글을 읽고 싶어해.
리뷰 조회수가 적은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닐까?"
룸메이트의 말에 나는 내가 쓴 글을 돌아보았다. 무조건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은 당연히 믿을 게 못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매사에 불만만 품는 사람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리뷰도 마찬가지다. 이것도 별로, 저것도 별로, 다 별로라고 하는 사람의 글은 읽고 싶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걸 까내리는 글을 누가 읽고 싶겠어.
어쩌면 나는 리뷰 꼰대가 아니었을까. 어떤 작품이든 좋은 점보다는 안 좋은 점을 더 많이 찾아내려고 악을 썼다. 남들을 물어뜯고 내가 맞다고 목소리만 큰 사람을 두고 우린 꼰대라 하잖아. 내가 바로 그 꼰대는 아닌가, 하는 고민과 함께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떤 작품이든 결과물을 사람들 앞에 내놓았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고된 일이다. 그 안에서 메세지를 찾아내고 의도를 읽어내는 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지만, 그렇다고 내게 비난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쨌건 결과물을 만들어낸 사람에 대한 존중만은 꼭 마음 한구석에 품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평론가로만 살 거라면 비난을 하든, 욕을 하든 상관 없었겠지. 하지만 나는 창작을 하는 작가다. 다른 창작가에 대한 존중과 이해 없이 무작정 물어뜯는 것은 창작가로서 해선 안 될 짓이다. 작품이 별로라면 개선할 수 있는 점을 찾아내고, 자그마한 칭찬 한 마디라도 더 하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긍정적으로 쓰기'를 리뷰에 도입하고 있다.
예술작품이 아무리 별로이더라도 욕부터 쏟아내기 보다는 천천히 내 나름의 긍정적 요소를 찾는다. 요즘에는 공격적인 말투를 썼다가도 지우고 말을 아낀다. 창작가의 입장에서 다른 작품을 살펴볼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걸 왜 좋아할까'를 알아내는 것이니까. 내가 아무리 별로라고 하더라도 다수의 입장이 긍정적이라면 긍정적인 요소를 찾아내고 나 역시 잘 활용해야 한다. 나의 공부는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나는 교수가 가장 아끼는 사냥개였다.
몇 번 수업을 해본 교수는 내가 핵심을 짚어서 문제점을 깊숙히 찌르는 데 능한 학생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그 이후 소설 창작 시간 내내 교수는 나의 생각을 물으며 수업을 시작했고, 나의 정리를 들으며 수업을 마무리했다. 나도 신이 나서 남들의 작품을 까댔다.
그런 나라도 소설 발표를 피해갈 순 없었다. 당연히 내 작품도 처절하게 물어뜯겼다. 하지만 누군가 나의 작품을 물어뜯을수록 나역시 상대방의 작품에 더 세게 이빨을 꽂았다. 그렇게 조그만한 문제점을 짚을 때 조차도 미안해하며 얼굴을 붉히던 학생들은 나중에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별로다'는 말을 쏘아댔다.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우린 작품을 이해하고 더 잘 쓰는 방법을 배운 게 아니라, 그냥 남의 작품을 헐뜯는 연습을 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그건 단순히 글에만 국한되지 않고 나의 삶의 전반적인 태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졸업할 즈음에 느낀 나의 가장 큰 변화는 사람이 매사에 시니컬해졌다는 것이다. 나는 염세적이고 부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그 태도를 버리는 데에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살아가면서 부정적이기만 한 태도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몸소 깨닫고 나서야 말이다. 물론 내 안에 흐르는 염세적인 기운을 온전히 떨쳐낼 수는 없겠지만, 억지로라도 긍정적이려고 노력할 필요는 있겠다.
그러니, 저의 긍정적이려고 노력하는 리뷰도 많이 보러 와주세요.(블로그 주소) 헤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