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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책을 낼 뻔했지만...

전업 작가 생존기

by 담작가

'승인 거부'

대체 왜? 머리를 쥐어뜯었다. 벌써 결제하기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는데 승인이 뜨지 않았다. ISBN이 이렇게 등록하기 힘든 거였나. 등록을 마친 뒤 프로페셔널한 표정을 짓고 싶었는데 미간에 주름만 잔뜩 잡혔다. 천 원을 결제하기 위해 30분 정도 매달리고 나니 더 이상 멋진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나. 이 책은 나의 첫 번째 책이 될 수 없는 운명임을.




작년 말에 나는 전자책 만들기 강좌를 신청해서 전자책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강좌에서는 이미 저작권이 만료된 옛날 소설을 사용했는데, 나도 비슷한 작품들로 강좌를 따라 하며 연습했다.

전자책 만들기는 어려웠지만 꽤 재미있었다. 잘못된 태그 때문에 열받을 때가 몇 번 있었어도 정리하고 편집하는 걸 좋아하는 특이 취향 덕분인지 즐기면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책을 만들기만 하고 등록하는 단계에서는 멈췄다.

이 책을 내는 순간, 좋든 싫든 이 책은 나의 첫 책이 되는 것이니까.


처음 전자책을 만들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내가 쓴 소설을 직접 책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공모전만 두드리자니 문이 쉽게 열릴 것 같진 않았다. 여태껏 몇 년 동안 해봤지만 소득이 없었으니까. 그렇다면 새로운 것에도 도전해볼 필요가 있었다. 요즘 세상에 꼭 한 가지 길로만 가라는 법 있나? 하물며 산 하나에도 등산로가 몇 개인데. 길이 없으면 내가 만들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전자책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런데 첫 책이랍시고 저작권 만료된 책을 등록하고 싶진 않았다. 비록 내가 저자에 이름을 올리는 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뱅이처럼 연습만 몇 번 해 본 채, 전자책 강의를 여태껏 미뤄왔던 것이다. 첫 책은 내 글로 만들겠다는 생각 때문에.


하지만 확실한 계획이나 생각도 없이 책을 만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고의 분량은 얼마나 만들 건지, 타깃 독자는 누구로 설정할 것인지, 책의 가격은 어떻게 책정할 것인지 등등. 이것 말고도 생각할 거리가 차고 넘쳤다.

이미 있는 작품으로 날름 전자책을 따라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막상 내 것을 만들려고 하니 알던 것마저 어려웠다. 이래서 출판사가 있고 편집자가 있는 거구나, 싶었다. 혼자서 그 역할을 다 하려면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해야 하는지도 알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서야 나는 거창한 계획을 세워 시작도 못하느니, 일단 시작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두사미보다는 사두용미가 낫지 않은가. 창대한 시작이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창대한 결말을 볼지 안 볼지는 나에게 달린 것이기에. 나는 연습도 할 겸 제대로 책을 만들어 등록까지 마쳐보기로 했다.


"해당 도서의 경우 이미 많은 도서가 중복등록되고 있어
ISBN 번호 발급을 시도하였습니다만, 반려처리가 되어
발급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웬 걸. 메일이 와서 확인해보니 내 책은 등록할 수가 없단다. 모든 책에는 ISBN이라는 각자의 고유번호가 있어야만 판매 등록이 가능하다. 내가 등록한 작품은 저작권 만료 작품이라 많은 사람들이 이미 등록한 상황이고, 그렇다 보니 더 이상 등록이 어려울 것 같다는 소리였다.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메일을 보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내가 등록하기를 수개월 미루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앞서 이 책을 등록했을까? 지금 내 꼴이 저 문장 그 자체다. 우물쭈물 미루기만 하다가 이 꼴이 날 줄 알았어야 했는데. 나는 언제나 나의 문제를 알면서도 호되게 당한 뒤에나 정신을 차릴까.


그렇게 자신을 자책하면서도 내심 '첫 책'에 대한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처음 ISBN을 등록할 때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간단한 결제조차 허용해주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너의 첫 책은 너의 글로 만들어라" 하는 운명의 계시는 아닐까? 이런 망상에 젖어있을 때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정말 계획대로 부지런히 써서 새로운 책을 만들어야겠다.

아직 세상에 없는 책, 나의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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