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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든 나무를 숲으로 돌려보낼 용기

전업 작가 생존기

by 담작가

갑자기 보일러실 문이 덜컹거렸다. 나는 집에 혼자였다.

혹시라도 누가 열어둔 창문을 비집고 들어와서
문을 열어보려고 문고리에 손을 올린 건 아닐까?

겁을 먹은 나의 뇌는 재빨리 문고리를 잡으라고 지시했다. 걱정으로 달아오른 심장은 절대 이 문고리를 놓지 말라고 명령했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몸을 단단히 고정해 문이 열리지 않도록 밀었다. 그러고 잠시 동안 더 소리가 나지 않는지, 문에 귀를 대고 기다렸다.




내 마음속에는 드넓은 숲과 작은 정원이 있다.

숲에는 매 순간마다 씨앗이 뿌려진다.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일들, 재미있어 보이는 것들, 흥미로운 사람이나 물건 등등. 무엇이든지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운다. 내가 하루에 물을 2리터씩 마시면서 그것들을 키워내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울창한 숲이 되는 것이다.

나는 종종 정말 마음에 드는 나무를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정원에 가져와서 다시 심는다. 마음에 드는 나무란, 다른 것들보다 더 관심을 쏟고 싶은 일들이다. 꼭 커다랗게 키워내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 수 있기를 바라는 일들 말이다. 어떤 것은 잘 자라지만 어떤 것은 처참히 시들기도 한다.


현실에서의 나는 식물 키우기라면 젬병이다. 물을 안 줘도 살아가는 선인장마저 죽이는 마이너스의 손이다. 하지만 상상 속에서는 종종 잘 키워내는 경우도 있다. 그 나무는 내가 정말 아끼고 좋아하는 나무니까. 온 힘을 다해 정성을 쏟는데 자라지 않을 나무는 없다.

현실이든 상상이든
어떤 나무가 죽는 이유는 오로지 한 가지다.
내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정확하게는 그 나무에 내가 더 이상 정성과 열정을 쏟을 만큼의 마음이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그 나무는 울창한 숲 속 어딘가에서 자라야만 한다, 내 좁아터진 정원이 아니라. 그 나무가 자라지 못하고 시들한 이유는 내가 다른 나무에게 관심을 쏟느라 바빠서 그렇다. 지금은 다른 중요한 나무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증거다.


현실이라면 나는 살목마가 됐겠지만, 내 상상 정원 속 나무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 내가 정원에서 꺼내 주기만 하면 된다. 문제는 내가 그 나무를 꺼내는 걸 극도로 꺼려했다는 것이고. 내 정원에서 훌륭하게 자라지 않는 나무가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나의 수치심으로 작용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무 키우는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정원에 시들 거리는 나무만 가득한 꼴을 이제는 더 이상 두고 볼 수만도 없는 일이다. 이러다간 숲도 정원도 모두 시들고 말 것이다. 생명의 기운이 아닌 죽음의 기운만 가득한 메마른 땅에는 어떤 씨앗도 싹을 틔울 수가 없으니까.


나는 오늘 공모전이라는 시든 나무를 숲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소리 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안 해! 공모전에 소설 제출 안 할 거야!"

하기 싫었다. 심사위원의 마음에 들어서 공모전에 당선되고 유명한 작가가 되는 열매를 맺는 '공모전 나무'를 키우는 건 재미없었다. 내가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 없는 나무를 정원에 가두기보단 내가 좋아하는 나무를 울창하게 키우는 게 더 중요했다.

내가 집중하고 싶은 나무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는 '소설 나무' 그 자체다. 여러 그루의 나무를 키우는 것보다는 한 그루의 나무라도 크고 단단하게 키우는 게 낫지 않은가. 시든 나무를 정원에 가두는 건 욕심이지만, 내가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기꺼이 숲으로 돌려보내는 건 용기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나무는 넓은 숲에 돌려보내고 지금의 정원에 집중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지금은 '공모전 나무'를 숲으로 돌려보내지만,
언젠가는 되찾아 올 거다.

정원이 조금 더 넓어지고 내게 여유가 생긴다면, 내가 놓아진 나무를 다시 기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문을 잡고 있던 나는 자신의 한심함을 탓하며 곧 문에서 손을 뗐다. 내가 걱정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았다. 비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씨를 보면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와서 문이 덜컹거린 건 너무 뻔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문이 흔들렸을 때, 나는 곧장 보일러실 문을 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창문을 닫았다.

실제로 우리의 두려움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에 불과하지만,
때로 우리는 그 바람이 영원히 머물 거라고 생각한다.

보일러실의 창문을 단단히 걸어잠그기만 한다면 문은 다시 덜컹거리지 않는다. 내가 지레짐작하고 창문 닫기를 포기한다면 그 바람은 영원히 나의 보일러실에 머물 것이고. 우린 문을 열고 나가 두려움의 실체를 마주하고 지나가는 바람이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창문을 닫아야 한다.

나는 무언가를 포기하면 사람들이 날 비웃을까 봐 두려워했다. 하지만 보일러실에 강도가 없었듯이, 실제로 날 비웃을 사람은 없다. 있더라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냥 창문을 걸어 잠그고 내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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