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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회색 신사들에게

by 담작가

책 [모모]에 나오는 회색 신사들은 인간들의 시간을 훔친다. 미하엘 엔데가 목격했던 이 시간 도둑을, 사실 나도 보았다. 그 도둑들은 하나같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지독한 바이러스를 주입시킨다.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우리는 시간에 집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회색 신사의 것이 되고 만다.


'낭비'라는 단어는 시간이나 재물을 헛되이 헤프게 쓴다는 뜻이다. '헛되이'는 아무 보람도 실속도 없다는 것이며, '헤프다'의 뜻은 아끼지 않고 함부로 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함부로'의 뜻은? 조심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한다는 뜻. 결국 '시간을 낭비한다'는 말은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을 보내 아무것도 남지 않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내 시간을 쓸 때마다 조마조마하며 안절부절못해야만 하나?
모든 시간을 일일이 계획하고 집중해서 사용한다면 시간이 많아지나?
마음 내키는 대로 쓰지 못하는 시간은 정말 내 시간인가?

낭비라는 단어는 상대적인 개념조차 아니다. 오로지 어떤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하하기 위한 용도로만 쓰인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말은 옳지 않다. 내가 그 시간과 돈을 만족스럽게 썼으면 그건 낭비가 아니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낭비는 없다. 종종 어떤 시간을 써서 없애는 소비만이 있을 뿐.


사실 내가 낭비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의 나는 그저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낭비 없이 사는 삶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만 하며 시간을 소비하고만 살아가야 한다면 삶은 왜 존재하는가. 내가 내키는 대로 단 한 번도 누리지 못한다면, '나'라는 자아는 존재할 수 없다.

마음껏 낭비하자. 낭비해도 괜찮다. 그것이 남의 시간을 앗아가진 않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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