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피든 내일 피든
때 이른 봄꽃이 피었다.
꽃들은 갑자기 더워진 날씨만큼 급하게 꽃잎을 열었다가 갑자기 추워진 변덕스러운 봄날을 경험하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꽃잎을 흔들지만 꽃들은 초연한 자세로 바람을 맞는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내가 알았겠냐는 듯.
불안했다, 아침에 눈을 뜬 순간부터. 불확실한 모든 것들이 두려워 당장 하루를 시작하는 것마저 버거웠다. 낭비가 아니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되뇌어도 불안함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그런 찰나에는 항상 두려움 상자가 마음속으로 배송된다.
발신인이 적히지 않은 상자는 마음에 들이지도, 열어서도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공포 영화의 주인공들이 으레 그렇듯, 열어선 안 되는 상자를 열고야 만다. 악의적인 두려움은 내 하루에 침투해 나를 망치려 한다. 난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발신인부터 곰곰이 생각해 본다.
발신인은 미래다. 미래는 항상 그런 식이다. 이미 일어난 세계에 존재하는 미래는 모든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 당도하지 않은 현재에게 겁을 주기 위해 두려움이 담긴 상자를 배송하곤 한다. 현재는 멈추지 않는 기차처럼 위협적인 미래를 향해 달려간다.
나는 결국 언젠가는 도달할, 어쨌든 닿게 될 미래로 간다.
꽃은 후회하지 않는다. 오늘 피든, 내일 피든, 결국 언젠가는 피어야 하니까.
피어야 할 때에 피우지 못하면 봄은 지나가 버리고, 자신은 흙더미 속으로 떨어져 다시 한 해를 기다려야 하니까. 때가 좀 일러 찬바람을 맞긴 했지만, 그게 꽃의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는 맞아야 할 바람이었다. 결국엔 지나갈 바람이다. 그래서 미래의 결과가 꽃들에겐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열차가 달리다가 역에 정차하는 시간은 1분 남짓이다. 현재는 쏜살같이 미래를 스쳐가고, 미래는 과거가 된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오는 사람을 맞이하고 내리는 사람을 배웅하고 나면 열차는 다시 다음 역을 향해 간다. 무슨 역에 당도할지는 모르지만, 언젠가 도착할 미래까지 걱정할 순 없다. 걱정해도 올 일은 오고, 신경 쓰지 않아도 스쳐갈 일은 스쳐간다.
미래는 열차가 가까워질 때쯤 마음으로 이런 상자를 배송하곤 한다. 그토록 정성스럽게 겁을 주려는 건, 미래도 두려워서일지 모른다. 자신이 별 거 아님을 우리가 미리 눈치챌까 봐서. 자신을 너무 빠르게 스쳐갈까 봐서. 내가 그 역을 떠나가더라도 자신을 오래오래 기억하라고.
나는 곧 다음 역에 도착할 때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역이 내가 오래도록 기다렸던 곳일지라도, 언젠가는 떠나야 할 것이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을 향해.
그러니 그저 지금 이 속도를 유지하며 달려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