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야 목소리에 불편함 한 스푼

반전 매력이라는 단어는 그냥 칭찬일까?

by 담작가

완전체 슈가맨으로 돌아온 씨야의 무대가 사람들의 마음을 들썩이고 있다.

나조차도 기다리고 염원하던 그룹이었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재생목록에서 씨야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흥얼거리고 있다. 아련한 짝사랑을 떠올릴 때면 자동적으로 흥얼거릴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선율과 귀에 박히는 목소리. 하지도 않는 짝사랑의 아련함이 가슴을 파고들 정도로 애틋한 목소리였다.

물론 씨야 세 명의 목소리 전부 좋아하지만, 그중에서 특히 남규리 씨 목소리가 굉장히 특색 있다고 생각한다. 높은 톤의 콧소리를 낮은 톤의 목소리가 눌러주면서, 높은음과 낮은음이 섞인 독특한 소리가 나온다. 두 개의 목소리를 동시에 나온다는 느낌도 든다.

누군가 '바람 불면 날아갈 것 같다'는 말이 어떤 말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단어는 남규리를 위해 있다'라고 하고 싶다. 그렇게 가녀린 사람에게서 이런 독특한 저음이 나온다니.

이런 걸 반전 매력이라고 하는 건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뭐가 반전이지? 여리고 가녀린 외모를 가진 사람이라고 목소리까지 가녀릴 필요는 없다. 목소리는 개인이 후천적으로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물론 약간의 변조 정도는 가능하지만,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갖는 목소리는 그냥 그 사람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보고 느낀 것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추측한다. 그래 놓고 그 추측이 틀리면 보통 '반전이다'라고 표현한다.




'이미지'라는 단어는 마법의 단어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 합법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 너 그런 것도 해? 아, 아니. 그런 이미지가 아니어서."

이미지는 실제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 잘 몰라도, 나의 개인적인 경험만으로 그 사람을 판단한 '상상'에 불과하다. '이미지'라는 단어를 한자로 하면 '심상(心像)'이다. 마음, 즉 느낌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 느낌이라는 것이 늘 맞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나는 새로운 사람에게 내 모든 것을 공유하지 않는다. 마음을 활짝 열어 내 모든 걸 보여주는 타입의 인간은 아니다. 비단 나만 그런 게 아닐 것이다. 일반적으로 처음 만난 이에게 내 모든 걸 보여주는 사람은 드물다.

나는 처음 만난 사람이 나와 친하게 지낼만한 사람인가 아닌가를 빠르게 판단해본다. 그게 매번 맞지는 않는다. 간혹, 나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에게서 나와의 공통점을 찾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정말 잘 지낼 것 같았던 사람에게서는 내가 싫어하는 어떤 모습을 발견해 거리를 둘 때도 있다. 이렇듯 인간의 감각이란 불확실하고 부정확하다.

그 이유는 인간의 감각은 결국 통계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가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경험해본 것은 아니니까. 제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본인이 경험해본 것만으로 상대방을 파악하려 들고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고도 오만한 행위다. 결국 우리는 누구를 만나더라도, 부딪혀서 직접 경험해보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미지'라는 고급스러운 단어로 이런 무례한 행위를 포장한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반전'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해 반대된다는 의미다. 반전 매력이라는 단어에 대입해보면 이렇다.

"외적으로 가녀린 사람에게서 그와 반대되는 저음의 목소리가 나와서 매력 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매력 있다'는 부분이 아닌, '반대되는'이라는 부분이다. 언뜻 들으면 칭찬 같지만, 사실 칭찬이라고 하기엔 어감이 이상하다. 반대된다는 것은 공통적인 범위 안에 들어가는 성질이 서로 상충할 때 쓰이는 말이다.

[가녀리다]는 것은 '연약하고 가늘다'는 뜻이고, [저음]은 '낮은 소리'라는 뜻이다. [가녀리다]의 반대말은 '튼실하다', [저음]의 반대말은 '고음'이다. 두 단어는 서로 상충하는 반대어가 아니다. 서로가 반대의 의미를 전혀 내포하지 않고 있다. 그럼 반대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은 '반전 매력'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했을 때의 예시다.

물론 이건 사전적으로 융통성 없이 해석했을 경우이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반전 매력'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 쭉 보였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 의외성이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해 줄 때 우리는 '반전 매력'이라는 단어를 쓴다.

주로 연예인에게 많이 쓰이는 말이다. 지고지순하고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수한 배역만 맡았던 배우가 표독스럽고 성공을 위해서는 악행도 서슴지 않는 배역으로 탈바꿈했을 때, 늘 강렬한 비트에 화려한 액세서리를 하던 가수가 혼자 조용히 독서하고 말이 없을 때, 무대 위에서는 처음 보는 관객과 어깨동무하며 능글맞게 굴던 개그인이 실제로 대화할 때는 어색해서 쩔쩔맬 때. 그런 경우를 반전 매력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장기적으로 보여주던 모습이 아닌 새로운 모습이기 때문에, 이런 경우는 나도 이해한다.


"저 사람 그렇게 안 보였는데. 반전이네. 이미지 확 깬다."

물론 연예인에 대해서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화면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이 진실인지 아닌지는 모르니까. 심지어 일반인인 우리도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만 알고 있는 모습이 있는데, 그들이라고 어련할까.

다만 내가 생각했을 때, '반전'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못 사용할 때는 이런 경우다.

상대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심지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이 세운 기준에 따라 사람을 판단했다가 그것이 틀렸을 때 반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그건 명백한 편견이고 선입견이다. 이미 문장에서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안 보였다'라고. 보는 것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아나?

내가 진심으로 가까워지고 싶어서 만들어가는 인간관계에서 의외성을 발견했다면 또 모른다.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익숙한 상대의 모습이 아닌 의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는 '반전'이라는 단어가 그리 나쁜 표현은 아니다. 어쨌든 그 사람이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것을 하나 더 보여준 것이니까. 나는 타인을 알아가며 친밀감을 느끼는 과정까지 지적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내가 집착하고 싶은 점은 바로 '편견'이다.

내가 남규리 씨의 목소리가 저음일 거란 생각을 의도적으로 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외적으로 보인 모습에서는 연약하고 말랐으니까. 이건 더 나아가 외모적인 편견이다. 그런 외모를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전부 작고 높은 톤이어야 해. 그래서 내가 남규리 씨의 목소리를 '반전 매력'이라고 표현한 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 보였는데, 라는 표현을 쓰는 것만으로 편견 덩어리라고 할 수는 없다. 상대의 새로운 모습을 존중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인간관계에서 그리 큰 문제를 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결국 '상대방을 알아가는 과정'이 포함되지는 않은 표현이다. 나의 일말의 편견을 깨트리는 지점에 대한 감탄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건 나쁜 의도가 없는 아주 소량의 편견이다. 하지만 나쁜 의도가 없다고 해도 편견은 편견이다.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을 멋대로 판단하는 데에 정당성이 부여되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스스로의 생각에 제동을 걸고 경계해야 한다.
혹시나 이것이 타인에 대한 편견은 아닌지 말이다.



"겨우 그런 단어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생각할 일이야?"

누군가는 그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그냥 칭찬으로 한 말인데, 무슨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고 파고드느냐고. 하지만 그런 편견이 쌓이다 보면 결국엔 나를 편견 덩어리로 만들 뿐이다. 겨우 그런 단어 하나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지 결정하는 셈이다.


인정한다.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다 보면 불편한 지점이 너무 많다.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가며 사람을 대하다 보면 억울하고 속상할 때도 많다. 나는 이렇게나 신경 쓰는데 세상은 그렇지 않은 것이. 그런 사람을 두고 우리는 바보라 부른다.

"야,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너도 신경 쓰지 마. 누가 신경 써달래?"

그래, 그럴 가치도 없는 사람에게 신경 써줄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신경 쓴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여야만 한다.

보통 신경을 긁는 말을 하는 사람은 다수이고, 그 말에 신경이 거슬리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소수가 된다면, 내가 신경 써서 피곤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스트레스받으며 살지 않을까? 그런 소수에게 작지만 나 하나라도 덜 피곤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신경을 써보려 한다.

이런 불편함이 조금씩 쌓이다 보면 비로소 편견 없는 사회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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