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가 페미니즘적인 이유

두아리파 'Boys will be Boys' 를 듣고

by 담작가

나는 'New Rules'로 두아리파를 알았고, 'IDGAF'로 그녀의 팬이 됐다.

음악에 대해 엄청난 식견을 가지진 않았지만, 매력적인 목소리에 특유의 리듬감이 더해진 노래가 마음에 들었다. 최근까지는 잘 듣지 않다가 얼마 전에 신곡이 나왔다는 얘기를 듣고 리스트를 찾아보았다. 그 중 가장 끌리는 노래는 화려한 댄스곡이나 화사와의 콜라보가 아닌 'Boys will be Boys'였다.


두아리파는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노래를 통해 그걸 증명했다.

그녀는 직설적이지만 날카롭지는 않게, 일상 생활에서의 성차별을 끌어낸다. 특정 집단을 싸잡아 비난하거나, 혐오를 조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동안 사회 속에서 관례처럼 여겨지던 성차별의 습관들을 꼬집을 뿐이다. 더불어 이제는 그런 성차별 되물림의 고리를 끊자고 주장하기에 나선다.

이렇게까지 세련되고 재치있으며 따끔하게 페미니즘을 주장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자신이 몸 담은 분야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금 이 사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페미니즘을 전달하고, 세상을 바꾸려는 이런 선한 영향력이 아닐까 싶다.


지금부터 써내려갈 가사에 대한 해석들은 지극히 나의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힌다.

그러나 진실과 경험에서 멀지는 않을 것이다.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남자들이 주위에 있을 때 손가락 마디 사이에 열쇠를 끼워넣었어
두려움을 숨기려 웃어 넘기는 거 좀 웃기지 않나?
도대체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데?

늦은 밤 거리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분명한 건 산짐승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도시에서는. 이제 그런 것들은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 문명이 이 지경으로 발달된 사회에서는 오히려 산짐승이 인간을 조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니. 그렇다면 귀신? 아마 그것도 아닐 것 같다. 이 질문을 들어본 적 있는가?

"집에 혼자 있을 때, 침대 밑에 귀신이 있는 게 무서워, 사람이 있는 게 무서워?"

누가 꺼냈는지 모를 이 한 마디 덕분에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포식자를 명백히 가릴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귀신이 더 무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숨어있는 게 무섭지 않은 상황이라고는 말 못할 것이다. 지구에서 인간을 이길 생명체가 없다는 것조차 오만한 착각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이 정말 무서운 이유는 같은 종족에게도 위협을 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위협은 주로 밤에 이뤄진다. 아무래도 환한 낮보다야 어두운 밤이 나쁜 짓을 숨기기에 더 편할 테니 말이다.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어둠 속의 범죄는 누구에게나 위험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에게 해를 가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이고 끔찍하다.

이런 비인륜적 행위에 대한 공포심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성별이 무엇이건 무서운 건 누구에게나 똑같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이 위험하니, 여자가 일찍 일찍 다녀야지."
"여자는 밤 늦게 다니는 거 아니야."

공포심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데, 왜 위험함은 성별을 가리는 것일까. 평생을 듣고 살아와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 저 문장에 이제야 의문이 든다. 사회는 왜 늘 여자에게 일찍 다니길 권유할까? 왜 여성은 유별나게 조심해야 하는가?

그렇게 유별나게 조심하라고 하는 것만큼, 여성에게 요구되는 사항은 더 늘어난다.

공포심을 겉으로 표출하지 마라, 덤덤한 척 해라, 자극시키지 마라. 혹시라도 밤거리를 걷는 나의 공포심을 즐기고 재밌어할까봐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연기를 해야 한다. 일부러 지지 않으려고 무섭지 않다는 거짓말을 해야한다. 그리고 말과 다르게 주머니 속에서는 무기가 될 만한 것, 도움을 요청할 만한 수십가지 방법, 나를 보호할 수단을 찾는다.

이 모든 짓을 그만둘 수는 없을까. 무서운 것은 그냥 '무섭다'고 말하고 싶다.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당하는 게 기분 나쁘다고? 정확하게 얘기해 주겠다. 여성은 날 뒤따라오는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 내가 '잠재적 피해자'가 될까봐 무서운 거다. 그러나 여자가 무섭다고 말하면, 이렇게 구구절절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그러게 겁도 없이 여자애가 왜 그렇게 늦게 다녀."

두려움을 두렵다고 말조차 할 수 없는 사회, 두려움을 느끼는 것조차 죄악이 되는 사회. 이곳은 정상인가?


같은 인간이어도 여성은 남성보다 특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는 갑자기 늘어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많았다. 난 그 시작이 어디인지 묻고 싶다.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많으니까 여성이 특히 조심해야 하는 건지, 여성은 '조심해야만 하는 약한 존재'라는 인식 때문에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늘어난 건지.

생물학적인 특성을 운운하면서 사회적으로 '여성은 약하다'는 인식이 박힌 것 자체가 여성에 대한 범죄 증가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같은 인간을 해치려는 것부터가 잘못됐는데, 왜 여성을 노리는 범죄자가 있을까. 여성에게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는 인식이 있는 것이다. 비슷한 예시로 가해자, 피해자라는 단어에는 성별적인 요소가 없지만, 우리는 대부분 임의로 성별을 나누지 않는가?

안전함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처럼, 공포심 또한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여성이 더 약하다고 말하지만, 이들에게는 더 몸을 단련시키고 강화시킬 수 있는 기회조차 없다. 여자애는 조신해야 한다며 운동하는 여자 아이들은 '왈가닥'이라는 칭호를 얻어야 했으니까.

여성이 특별히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었을까? 밤 늦게 돌아다니는 게 여성이건 남성이건 누구나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진정 없는 것일까?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드려고 노력이나 해 봤을까?




우리가 난리치지 못하게 그들이 우리한테 가르친 병든 직감들
자신을 숨겨가면서까지 그들의 말을 막기 위해 뭐든지 했지
우리는 분위기가 싸해지지 않기 위해 웃었어
하지만 거기엔 웃긴 건 하나도 없었지



언젠가부터 '여자의 촉', '여자의 직감'이라는 말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똑같이 경험해보지 못한 두 가지 보기를 두고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 그 때도 촉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결국 촉이니 직감이니 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의 느낌에 불과하다. 경험과 통계에 근거한 합리적 판단을 두고 직감이라고 하진 않는다. 이런 무의식적 끌림에 의한 선택이나 판단은 일상 생활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그럼에도 사회는 늘 '여자의 직감'을 운운한다.

나는 이 단어를 누군가 의도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불쾌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다.

여성이 '직감적으로 발달해있다'는 프레임을 씌우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그러게, 어떻게 보면 칭찬일 수도 있다. 직감적인 선택이 때로는 상황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때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악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여성이 직감적으로 발달해있기 때문에 위험함을 미리 예측하고 그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피해망상 같다고 생각한다면, 고전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주겠다.

"너가 얼마나 남편 단속을 안 했으면, 남편이 바람을 피우니."

실제로 옛날 시어머니들이 자주 했던 말이다. 이혼녀가 어떻게 비춰지는지는 얼마 전에 종영한 부부의 세계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분명 잘못을 한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사람들은 아내를 두고 수군거린다. 최근에는 인식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남편의 외도마저 여자가 처리하지 못해 벌어진 사건처럼 여겨지는 것이 대다수였다.

"도둑이 들었을 때, 문단속 제대로 못한 집주인한테도 책임이 있는 거지."

문단속이 되어있지 않은 집을 보고, 남의 것을 무단 탈취하려는 자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다 한 번씩 도둑질 경험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교실 바닥에 떨어진 펜을 줍는 것도 도둑질이라는 친구의 말에, 바닥에 떨어진 물건은 늘 칠판에 가져다 두었는데 말이다. 일례로 부부의 세계에서 여다경(한소희)이 불륜을 합리화 할 때 비슷한 말을 했던 걸 떠올려보자. 여하튼 이런식으로 여자의 직감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너무나도 많다.

어느 새인가 여성은 위험한 상황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 여성에게 사회는 냉혹했다. 혹시 일어날지 모를 범죄에 대비해야 하니까 밤 늦게 다니지 말 것. 범죄에 동의하는 행위로 여겨질 수 있으므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지 말 것.

화장을 하고 짧은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기르는 것. 그것은 내가 살면서 경험한 것들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한 것 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것이 사건을 일으킨 발단이라고 말한다. 발단을 만들었고, 범죄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여성은 피해를 입었을 때 가해자의 책임을 반으로 나누어 가져야만 했다.


직감적으로 '아, 내가 이런 옷을 입으면 상대방이 기분 나쁜 표현을 하겠구나'하는 예측을 하지 못한 날은 기분 더러운 표현에도 웃어야만 한다. 상대방이 성희롱, 성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건 그냥 '농답'에 불과하니까. 그런 웃자고 하는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사람이 되는 순간부터 나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

아마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유머를 모르고, 피곤하고, 귀찮은' 사람이겠지.




나는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더 있을 것이라 확신해
날 구해줄 남자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알아
방금 건 빈정거린 거였어
네가 혹시 맨스플레이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으니
아, 발레나 계속 했어야 했나

어려서부터 여성은 '나는 약한 존재'라고 세뇌당하며 자신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다.

예컨대 발레가 대표적인 것이다. 어릴 적 발레 수업, 피아노 수업을 듣는 것은 여자 아이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발레 수업에 남자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고, 가끔 누나를 따라 온 남동생들은 그 자리를 매우 창피해하며 다음부터는 다시 오지 않았다. 부모님들은 아이가 발레를 하건 말건, 피아노를 치건 말건, 누구보다 화려한 옷을 입히고 사진 찍는 데만 치열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적 발레를 재밌어서 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발레복을 입고 플랫슈즈를 신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게 공주님이 되는 방법 같았고, 그 때는 공주가 되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으니까. 물론 엄마가 내가 하고 싶은 것 말고도 많은 경험을 시켜준 덕분에 내가 수영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굳이 일상을 뒤져보면 지금보다도 훨씬 많은 차별적 요소가 심어져 있을 것이다.


여성을 약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남성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여성이 '약한 만큼' 남성은 '강해야만' 하니까. 남성은 늘 굳세어야 하며, 힘든 일을 처리해야 하는 존재로 남는다. 중요한 것은 어려서부터 교육된 이런 성차별적 인식들이 이어지면서, 젊은 세대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기회를 박탈당한다는 것이다.

"넌 가만히 있어, 다 내가 해줄게."

가수 '남진'의 '둥지'라는 노래의 가사다. 무려 후렴구에 이런 가사가 들어간다. 이는 마초, 강한 남자 같은 남성중심적 사고, 즉 맨스플레이가 어떻게 여성에 대한 차별로 전락하는지 보여준다. 이 사고에 따르면 여성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집안과 집 밖을 나누어 여성과 남성의 일을 나눴던 과거의 행적은 여전히 이어진다. 왜 여자 아이들은 엔지니어를 꿈꾸지 않았을까? 왜 남자 아이들은 발레리나를 꿈꾸지 않았을까?

엔지니어도, 발레리나도, 아마 '못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언제가 되야 우리가 그만 말할 수 있을까?
그들은 항상 듣고 있잖아
아니, 애들이라고 괜찮지 않아
그들은 본대로 행동해
티비에는 모두 그렇게 나오잖아
오, 애들은 괜찮지 않아
남자는 그래, 남자는 그래, 남자는 커서도 소년이야
하지만 소녀는 여성이 되지

단언컨대, 우리를 성차별적 프레임 안에 가두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미디어라고 장담한다.

일상 관찰 예능이 대세라고들 한다. 티비 쇼는 스타의 이면을 보여주며 의외성을 조명하곤 하는데,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눈살 찌푸려지는 자막은 '천상여자'라는 자막이다. 코미디언이든, 운동선수든, 가수든, 연기자든. 어떤 여자연예인이 나와도 '의외로 어느 부분에서는 천상여자'라는 식의 흐름이 정말 보기 싫다.

대외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여성일지라도 누구나 속에서는 이런 여성성을 갖춰야 되는 것처럼 들린다. 그냥 그건 그 사람의 특성에 불과함에도 그것이 '여성성'에 의한 행동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싫다. 비슷하게는 '상남자'라는 식의 표현도 싫다. 누구나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으로 인해 크고 작은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삶의 방식이나 일상의 행동 속에서도 그런 것들은 선택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인간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라고 '성적 당위성'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아이들은 이렇게 만연해있는 성차별적 프레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심지어 이제는 아이들이 그런 성차별적 프레임의 수단으로 쓰인다는 생각도 든다. 가족예능, 육아예능 속에서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의 행동을 어른에게 하듯 구별짓는 것만 봐도 뻔하다. 여자 아이가 남자 아이를 세심하게 챙기는 것,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나서는 것. 과하다고? 진짜 과한 생각일까?

우리는 이 무한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앞선 맥락들을 총집합해보면, 여자 아이들은 '직감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예방할 줄 아는 '성숙한' 여자가 되야만 한다고 강요당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여자 아이든 남자 아이든 모두가 이 프레임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남자 아이들은 이 프레임과 더불어 어른들의 몇 마디를 통해 합리화를 배운다.

"남자애들이 다 싸우면서 크는 거지."
"남자는 사고 한 번씩 치고 그러는 거지."
"남자는 다 그래, 그러면서 크는 거야."

그 결과로 여성은 늘 남성을 보듬고 품어야 하는 희생적 존재이자, 그에 대한 대가로 남성의 전유물이 되어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더불어 남성은 여성의 희생을 밑바탕 삼아 성장해야 하는 부족한 존재로 전락한다. 이 각각의 프레임은 어떻게 작용하냐면, 결국 여성과 남성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걸로 귀결된다. 결혼, 육아에 대한 당위성을 이 프레임을 통해 이어가는 것이다. 정말 듣기 싫은 꼰대들의 말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 결국 성차별적 교육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식의 교육으로는 누구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없다.




만약 이 노래가 불편했다면
너는 분명 뭔가 잘못하고 있는거야

이 노래, 혹은 이 글 때문에 기분 나쁘다거나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그동안 차별당해온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당연스럽지만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여성의 차별을 말할 때 남성에게 주어졌던 그런 권한들을 짚지 않을 수는 없다. 자신에게 주어졌던 권한,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누렸던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명확하게 입장을 밝히고 싶은 것은, 이 노래가 '여자가 당하는 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남성을 비난하거나 다그치려는 노래가 아니라는 뜻이다. 남성들이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누리던 것들이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을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어떤 부분이 차별이라고 느끼는지, 왜 그런지 말해주겠다는 노래다. 두아리파는 이 노래를 통해, 이제는 소외되었던 부분들에 대해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내가 처음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노래에 대한 갖가지 반응 때문이었다.

물론 나도 여성이 왜 그런지 구구절절 설명하고 설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 역시 고착된 성차별 프레임에 의해 여성이 남성을 '챙겨'주어야 하는 것이라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으니까. 그럼에도 적어도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명확하게 이유와 해결책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이걸 말해야 아냐, 이미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됐다'는 식의 반응은 갈등만 야기할 뿐이라고. 경험에 기반한 분노는 공감할 수 있지만, 목적성도 방향도 없는 분노로 표출된다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앞에도 말했지만, 여성이 두려운 것은 '잠재적 범죄자'가 아니라 자신이 '잠재적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목적성 있는 분노'를 표출하기를 원한다.


그저 내가 제시하는 것은 '말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기' 일 뿐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도 한다. 말을 하기 전에 이것이 상대방에게는 불편하게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괜한 걱정'을 한 번씩 해보길 바란다. 이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의외로 쓸모있는 습관이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상대방을 존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그러면서 일상 속에서의 내 말과 행동을 고치게 되고, 점차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상대를 존중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인지도 알게되지 않겠는가?




이 글을 아주 오랫동안 수정해왔다.

혹시나 비난을 당하지는 않을까, 내 의도가 잘못 전달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내 자신이 치우친 건 아닌가'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평등을 주장하는 나조차도 사실은 차별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발행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올리고자 결심하게 된 것은, 내 생각이 무조건 옳을 수는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잘못을 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발판 삼아 자신을 뉘우치고 반성하며 성장하느냐인 것이다. 게다가 내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누가 내게 먼저 다가와서 이야기를 하겠는가. 나는 이런 생각을 갖고 있어요, 하고 말한다면 상대방 또한 내 생각은 이렇다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사람과 사람 간에 오가는 대화의 힘을 믿는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내 생각에 대답해주길 기다리며 나는 발행 버튼을 누를 뿐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씨야 목소리에 불편함 한 스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