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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Apr 03. 2020

진실은 늘 벽 너머에 있다

넷플릭스 영화 [더 보이] 리뷰

더 보이
줄거리

미국에서 말못할 아픔을 겪고 영국으로 도망친 그레타 에번스.

동화 속 저택 같은 힐셔 부부의 집에서 일하기로 한다.

그녀가 맡은 일은 오랜 여행을 가는 노부부 대신 아이를 맡아주는 것.

그런데 하필 힐셔 부인과의 첫만남부터 신발을 벗고 집에 들어오는 결례를 범한다.

급히 신발을 신으려 하지만, 제자리에 벗어둔 신발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곧 찾을 거예요. 브람스가 좀 짖궃어서..."

그러나 만나러 간 아이는 유리로 만들어진 남자 아이 인형이었다.

오싹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지만, 일을 하기로 한 그레타.

노부부가 떠난 첫날부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하는데...




진실은 늘 벽 너머에 있다
숨은 의미 찾기

  넷플릭스 영화 뒤적거리다가 '더 보이' 궁금해서 리뷰 찾던 사람이라면, 일단 추천 박고 시작한다.

  요즘 넷플릭스 관련 영화나 드라마 리뷰가 인기가 많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집에만 있으면서 볼만한 걸 찾다보니 그러는지도. 나도 마찬가지고. 아무래도 넷플릭스 리뷰를 많이 올려야 할 듯.

  그 중에서도 영화, 특히 공포영화를 선택하는 게 쉽지가 않다. 식상한 영화들이나 뻔한 영화들 빼고 볼만한 걸 찾고 싶다면 '더 보이'는 꽤 괜찮은 영화다. 영화 포스터나 줄거리만 보면 애나벨을 떠올리기 십상이다. 처음엔 나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애나벨의 식상함을 깨버린다. 오히려 애나벨에 실망했던 마음을 사이다로 씻겨주는 기분.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부수는 영화랄까.

  컨저링, 애나벨 시리즈가 대히트를 치고 난 후부터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다루는 영화가 너무 많아졌다. 영적인 존재를 다루는 내용의 영화는 이제 너무 익숙하다. 뭐든지 악령의 소행이고 장난이다. 악령의 모습이나 그들의 장난 때문에 깜짝 놀라는 장면만 쭉 나열할 뿐. 스토리가 탄탄한 공포영화는 찾기가 힘들다.

  그런데 이 영화는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음에도 전혀 예측이 불가능했다.

  이건 끝나고 나니 감독한테 배신감을 느끼는 수준. 어쩐지 너무 뻔한 클리셰들을 늘여놓더라니 그게 사실은 다 페이크였다니. 충공깽 그 자체. 페이크라는 걸 알지 못했다는 자체가 이미 인형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겨버렸다는 뜻이다.


  가장 첫 번째 페이크는 힐셔 부인이 적어준 규칙과 스케줄 표였다.

  초장부터 관객은 속아 넘어간다. 주인공이 인형에 대한 규칙을 지키지 않는 것, 인형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치하는 것을 보고 발을 동동 구른다. 고구마 천오백 개 먹은 것처럼 답답하고 주인공 욕을 하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저 인형 때문에 이제 큰일 날 거란 예감만이 관객을 사로잡는다. 여기에서 이미 게임은 끝났다.


  두 번째 페이크는 그레타 주변을 맴도는 남정네들.

"그 남자가 니 원피스 입고 립스틱 떡칠한 채 문앞에 서 있을걸?"

  가족들이랑 영화를 같이 봤는데, 엄마는 영화 중반을 달릴 때까지 내내 말콤이 수상하다고, 수상하다고 난리였다. 특히 저 대사 나오고 난 다음부터는 집에서 그림자 보일 때마다 진짜 립스틱 떡칠남 아니냐고ㅋㅋㅋ공포영화 보다가 현웃터져서 한참을 웃었다.

  생각해보면, 말콤은 사람에 따라서는 주인공이 혼자가 아니라는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동시에 어쨌든 외부인이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인식을 준다. 가장 믿음직스러우면서도 의심스러운 사람인 것이다.

  식료배달하는 사람이라는 명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은가. 그레타는 이 집을 떠날 수 없다. 자신이 이 집과 인형을 지키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레타보다 더 오랜시간 이 집을 드나들어서 집에 대해서도 더 잘 안다. 게다가 힐셔 부부가 돈을 말콤에게 맡긴 바람에, 그레타는 말콤이 와야만 돈을 받을 수 있다. 그야말로 그레타는 철저하게 을인 셈이다.

  여기에 또 다른 위험은 그의 전 남편인 콜이다.

  언니와의 쓸데없는 통화 내용이 계속 나오는 이유도 전 남편에 대한 압박을 계속 주기 위해서다. 그는 상당히 폭력적인 사람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알려주지 않으려 했건만, 그레타가 일하는 이곳의 주소도 알고 있다. 그녀는 도망쳐온 사람에게 또 다시 쫓길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있음!*

반전을 확인하고 해석도 보러 오세요!


  사실 영화는 충분히 암시를 줬다.      

  가벼운 것부터 얘기하자면 말콤. 그는 이 집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첫 장면에서 그레타는 자동차를 타고 이 집에 들어왔다. 살짝만 생각해도 말콤은 그레타와 함께 나가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별 것 아니지만, 자동차는 영화의 시작과 끝을 똑같은 장면으로 만들어 준다. 아름다운 수미상관... 기본적인 구도에 충실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차를 타고 들어왔으니 차를 타고 나간다. 영화가 끝날 때 쯤에야 말콤을 의심했던 게 좀 미안해졌다.


"사람들한테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 아들은 살아 있어요.
우리 곁에 있죠. 이해하겠어요?"
"우리 애가 에번스 양이 좋대요. 아이의 선택을 받은거죠."
"브람스는 별난 아이였어요."


  이렇게나 떡밥을 던졌음에도 관객은 결국 인형에 정신이 팔릴 수 밖에 없다.

  주인공을 위협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벽 속의 남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위험하다고 생각할 수 조차 없다. 그레타가 겪는 모든 위험과 공포를 그저 인형의 탓으로 돌린다. 물론 힐셔 부부가 주인공을 속였는데, 그걸 어떻게 아느냐! 라고 해야겠지만.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던가.

  말콤에 브람스에 대해 암시하던 내용은 교묘하게 인형의 모습과 비슷하다. 브람스는 대외적으로 착하고 총명한 아이였다. 그러나 술집에서 떠도는 이야기는 그와 다르다. 친하게 지내던 여자 아이의 머리통을 깨트릴 만큼 잔혹한 아이라는 뒷 이야기. 그 중에 어떤 게 진실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인형은 그저 우리의 내면을 포장하기 위한 상징에 불과하다.

  우리는 늘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나도 모르게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판단이든, 진실은 벽 너머에 있다. 인간의 본성은 벽 속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극한의 상황, 누군가 자신의 겉모습을 파괴하는 순간에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정상적인 인간관계 맺기를 힘들게 한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유리 인형만을 내놓고 자신은 벽 속 깊숙이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만도 하다. 진짜의 모습으로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이야말로 감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본심을 보여주지 않는데, 내가 왜?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나조차도 진짜 내 모습 대신 만들어진, 갖춰진 모습만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내가 그동안 맺은 인간관계는 과연 진실된 것이었을까?

  하지만 벽 속에 숨어만 있는 것이 사회에 부작용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진심을 꺼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사이, 외로움이 우리 마음으로 침투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벽에서 나와 인형이 아닌, 진실된 자신의 모습으로 상대방을 마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만이 병든 현대인들을 치유할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영화가 현실에 던지는 위로
감상문

  특별히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면서 영화를 보지는 않았다. 정말 오랜만에 공포영화가 보고 싶어서, 집 안의 모든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봤더랬다. 생각해보면 공포영화를 보면서 교훈을 찾으려 드는 게 더 공포스러운 일일지도. 그럼에도 보고 난 후에 곱씹다 보면 직업병처럼 계속 이것저것 엮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개인적으로 공포영화란, 현실에 여운이 남아야 진짜 무서운 것이란 생각이 든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현실에서도 영화 내용이 아른거리면서 괜히 주변 공기를 휘적거리게 되는 그런. 내가 그런 편인데, 공포영화를 보면서는 별로 무서움을 못 느낀다. 에이, 뻔하네, 하고 넘어가 놓고서도 막상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부터 괜히 무섭다. 영화를 볼 때는 스크린 너머를 구경하는 것 뿐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그게 내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스토킹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인형 눈에 감시카메라를 달아놓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더욱 소름이었던 것 같다. 현실을 돌아보니 막막해서, 재미라도 즐기고 싶어서 공포영화를 봤는데. 오히려 보고나니 더 찝찝하다. 텔레그램 사건이 내 머릿 속을 헤집어놓고 있다. 무서움에서 시작해 아픔으로 끝나는 영화였다. 그나마 위안인 것은 그레타가 브람스에게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 영화에서나마 희망을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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