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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May 04. 2020

완벽에 대해 저항하기

소설 [딸에 대하여] 리뷰

딸에 대하여
줄거리

'나'에게는 딸이 있다.

아주 잘 아는 것 같지만, 전혀 모르는 것 같은 딸이.

집 보증금 문제로 오갈데 없는 딸에게 집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럼 우리 같이 들어갈게."

그런데, 딸이 '그 애'를 데리고 왔다.


완벽에 대해 저항하기
숨은 의미 찾기

  소설 속 어머니는 딸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건 어쩌면 모든 이의 소망이자, 절대 이룰 수 없는 이상과도 같은 것일테다. 그저 그런 인생을 산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도, 살면서 영원히 간직할 추억이 있을 수 있다. 그저 흘러가는대로 산다고 말하는 누군가에게도, 인생을 통째로 뒤집을만큼의 전환점이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인생이란 그렇다. 평범할 수 없다. 남이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삶이란 그렇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말은 인생을 정의하기에 소름돋을 정도로 적절한 말이다.


  그나마 '평범하게'라는 말과 호환되는 단어를 찾아보자면 '시대적인'이라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공평하든 아니든 신경쓰지 않는 것, 남들이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 평범하다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지는 않으나, 대체적으로 내가 겪었던 '평범'의 범위는 그랬다.

  그래서 최근에는 시대가 요구하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많다. 그보다는 내가 살고싶은 나만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다. 간혹 그런 자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들이 있다. 왜 그냥 평범하게 살지 못해? 왜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살지 않는데? 질문에 대한 답변과 또 다른 질문은 팽팽하게 대립한다.

  이 책은 그렇게 대립되는 딸과 엄마를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딸의 시선이 아닌, 엄마의 시선에서 이 모든 상황을 전개한다는 점이다. 보통 소설은 주인공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님을 설득시키거나, 결국 그렇게 함께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리곤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딸이 살고자 하는 삶도 삶이라는 것, 그 삶 조차 딸의 기준에서는 평범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시간을 그려낸다.


  어머니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딸이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면서 뒷바라지를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처럼 살길 바란다. 늙어서까지 자신같은 육체노동을 하지 않길 바라지만, 사회적인 압박에 저항하지는 않는 삶을 살길 바란다.

  이 이상하고도 묘한 욕구는 '남부럽지 않은 딸'을 키워내고 싶은 시대적인 가치관에 세뇌된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들 앞에서 떵떵거리며 편하게 돈을 벌고, 그러면서도 '정상적인' 가족을 꾸리고 살아가는 딸. 어머니들이 원하는 딸은 늘 '강한 여성'이어야 함과 동시에 '완벽한 여성'이어야 한다. 자신이 충족하고 살아가지 못했던 모든 부분을 충족하며 살아가는 딸의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들에게 허락된 것은 너무나 적었으니까. 집의 가장역할을 아버지 혼자 충족할 수 없게 되자, 어머니들 또한 가장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전통적인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충족하지 못한다는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시대적으로 그런 과도기를 거친 어머니들은 주로 딸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으면서, 가정 내에서도 완벽한 어머니'이기를 바란다. 물론 시대가 변하면서 더 다양한 양상의 어머니들이 생겼겠지만.


  어머니의 이런 생각은 젠을 바라보며 더욱 뚜렷해진다.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으며 살아온 젠에게 결국 남는 것이라고는 쓰레기 취급을 받는 상장 쪼가리들 뿐이다.

  어머니는 그 이유가, 젠에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젠에게 후원받으며 살아온 아이조차도 욕창이 난 엉덩이를 깔고 누워있는 젠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어머니는 이런 우울하고 비참한 삶의 말로가 자신과 딸에게 찾아올까봐 걱정한다.

  딸이 결혼을 하지 않으면 자신도 이렇게 죽어갈 것이고, 딸 또한 가족이 없으면 이렇게 죽어갈 것이라는 걱정. 그러나 같이 일하는 새댁은 자신의 어머니도 요양원에 있으면서, 다른 노인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가지 못한다.

  이로서 결혼이 과연 늙음과 죽음을 지켜줄 수 있는 울타리가 되는지에 대한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젠을 정성껏 돌본다. 그런 모습은 딸을 위해 월세와 생활비를 버는 '그 애'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아무 조건 없이 베풀고 희생하는 삶.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돌보기 위한 삶. 이 지점에서 어머니는 자신과 딸의 연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똑같이 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듯 보인다.

  그 애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 저항하는 사람. 어떻게 자신이 그런 사람일 수 있을까.


  화자는 어머니로서 소설을 시작해 한 인간으로서 마무리를 짓는다.

  그러나 저항하는 일에 알레르기가 있을 지경인 어머니가 딸과 같은 모습으로 사회에 저항하는 순간, 딸의 일은 곧 자신의 일이 된다. 자신이 딸과 같은 위치에 서 있다는 것. 그것은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신에게도 이 저항은 중요한 것, 자신의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지껏 자신이 희생하고 살면, 딸이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살면 그런 삶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 그녀의 믿음은 깨져 버린다. 자신이 요구당해왔거나 꿈꿔왔던 '강인하고 완벽한 여성'이란 누굴 위한 것이었을까. 모든 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권리지만 누군가에게는 인정되지 않는 권리에 대하여 어머니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는 편에 서기로 한다.

  이 소설의 어머니는 딸이나 그 연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다.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시간들과 삶의 흔적들이, 다 옳은 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그 생각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그 시간을 겪음으로서 딸이 서 있는 위치, 딸이 가고자 하는 세상, 딸의 삶, 딸의 시간이 온전히 딸의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다. 어쩌면 소설이 끝나고 어머니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 과정은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그 받아들임의 시간을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가 내린 결론이니까.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을 때'에는
감상평
"사람은 절대 다른 사람을 이해 못해. 그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이해해?"

어릴 적, 친구를 위로하려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그 친구의 말투는 아주 단호했다. 너는 절대 날 이해 못해, 같은 어리광 섞인 말투가 아니었다. 인간은 결국 인간이기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죽을 때까지도, 아니 죽어서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친구의 말은 절망적이고도 암울하게 들렸다.

  인간은 정말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도 쉽게 이해한다는 말을 할까. 사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왜 상대에 대해, 누군가에 대해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걸까? 그건 그냥 착각인 걸까? 그런데 왜 우리는 이해하지도 못할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며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아파해주는 것일까. 


  소설의 어머니는 솔직하다.

"나는 모르겠다. 너희를 내가 이해할 수 있을지, 살아생전에 그런 날이 올지. (중략)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중략)
그럼에도 노력해 보겠다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는다. 그런 헛된 기대를 심어 주고 싶진 않다."

  위선적이게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만큼의 시간을 달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뭉클하다.


  상대방과 같은 입장이 되면 상대방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을까?

"니가 내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

  내가 그 사람과 동일한 입장이 된다고 알 수 있을까?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다른 감정을 느끼고,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 살아온 모든 흔적이 같을 수가 없기에, 인간은 결코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너무나 단단하고 높은 벽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벽의 이름은 '시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해' 대신 '인정'라는 방법을 택하기도 한다.

  너는 너구나, 그렇구나. 이건 어쩌면 자기 만족에 가까운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상대방을 인정하는 행위는 너무나 길고 두터운 시간이라는 벽을 달려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이고도 아름다운 방법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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