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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May 31. 2020

개의 목표는 충성이 아니다

영화 [베일리 어게인] 리뷰

베일리 어게인
줄거리

골든 리트리버로 태어나 이든이라는 소년과 가족이 된 베일리.

이든의 모든 것을 지켜보며 일평생을 살고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눈 떠보니 내가 경찰견 셰퍼드라고?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는 개의 일생 이야기.


개의 목표는 충성이 아니다
숨은 의미 찾기


  반려동물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개와 고양이다. 지구에 적응하기 위해 인류는 많은 동물들을 인간의 삶과 분리했지만, 그들만큼은 늘 곁에 두고 지냈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를 두고 봤을 때도, 이들은 인류와 가장 가까운 동물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삶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인지 개와 고양이를 주제로 한 이야기는 늘 있어왔다.

  나 또한 개를 키우는 입장이지만, 이상하게 이런 이야기는 꺼려졌다. 반려동물, 특히 개를 주제로 하는 영화들은 내용이 너무 뻔한데다가 구조적으로도 발전이 없어보인다고 생각한 게 이유였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동물을 좋아하다보니, 개와 고양이를 주제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는 특히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작품에서 많이 발견된다.

  '하얀 마음 백구', '안내견 탄실이', '플랜다스의 개', '돌아온 래시'와 같이 주인에게 충성심 강한 개의 이야기는 참 많다. 그러나 이게 전부다. 고양이는 까칠하고 도도하다는 성격적인 인식 때문인지, 고양이가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내비추는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개의 경우는 좀 다르다. 늘 개는 작품 속에서 주인과 함께여야만 하며, 주인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주인을 그리워하고, 주인 품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로 표현된다.

  '개바개', '냥바냥'과 같이 최근에는 그들에게도 모두 다른 성격이 존재한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는 늘 작품 속에서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려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눈물만 짜내는 억지 신파극과 차이점이 없다. 시대가 변했고, 동물에 대한 시각도 변했다면, 예술작품도 그에 맞게 따라가 주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베일리 어게인'은 충분히 괜찮은 영화이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영화 속 '베일리'는 계속해서 환생을 하며 여러 주인을 만나 살아간다. 개의 수명이 짧다는 점을 환생에 연결해서 소재로 사용했다는 점이 좋았다. 우리는 보통 개에 대해 짧게 살다가 가는 존재라고 인식한다. 인간 스스로에게는 전생, 환생이라는 기회를 통해 계속적인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동물은 인간과 동급의 존재로 두고 바라보는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지구는 어떤 주인도 섬기지 않는다. 인간이 그렇게 착각할 뿐이다. 우주의 섭리가 그러하듯이, 모든 생명은 태어나면 죽는다. 인간중심적 판타지를 개에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참신함이 돋보였다.                    


  베일리는 매번 환생할 때마다 성별도, 품종도 다르다. 그러나 매번 주인을 만나는 것은 작은 철장이나 상자 속에서다. 심지어 가장 첫 번째 생에서는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는다.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았지만, 아마도 도살당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개도 인간과 같은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간략하고 덤덤하게 읊어서 마음 한켠이 불편했다.

  이는 인간이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다.

  한평생 사랑받고 자라는 개도, 결국 어떤 인간의 손에서 팔려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 우리 인간은 여전히 지구의 포식자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동물들이 자유롭게 살 권리를 잃고 인간의 욕심과 욕심 사이에서 거래된다는 사실. 우리 인간에게 동물을 가두고 구경하거나, 사고 팔 권리가 있을까? 여전히 반려동물이 개인의 '사유재산'으로 취급될 수 밖에 없는 이런 사회적인 현상은 안타깝고도 슬프다.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면서 제목을 '베일리 어게인'으로 바꿨는데, 원 제목은 '개의 목표(A Dog's Purpose, 2017)'였다. 베일리는 영화가 시작하면서부터 내내 '자신의 삶의 목표'를 생각하려 애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게 개의 목표다."

  영화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베일리가 이든을 찾아 '일부러'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베일리는 여러 번의 삶 속에서 다양한 주인을 만난다. 그 속에서도 내내 이든을 '그리워'한다. 보통 개가 주인을 못 잊고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통해, 개가 주인을 그리워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이 영화에서는 다르다.

  이든은 베일리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었고, 그 경험을 통해 베일리는 다른 주인들에게도 사랑을 줄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

"나도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책임하게 마트에서 개를 사와 집 앞 마당에 방치해둔 주인이 자신을 버렸을 때, 베일리는 말한다. 자신도 그 집이 재미없고 싫었다고. 이 장면 덕분에, 영화는 흔해 빠진 반려견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주인을 사랑하는 것을 베일리가 선택할 수 있었듯이, 주인을 싫어하고 떠나는 것 또한 베일리가 선택할 수 있다.

  그건 베일리의 권리이자, 인간이 강요할 수 없는 베일리의 '마음'이다.

  우리는 개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이 우리에게 충성을 다하고 나만을 바라볼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개도 좋고 싫음을 구별할 수 있다. 우리가 개에게 적대적으로 굴면 개도 나에게 적대적으로 굴듯이, 내가 잘 보듬어주지 않으면 개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이것이 영화를 가장 매력적이게 만든 부분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듯이, 개도 우리와 관계 맺기를 원한다. 우리는 때로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개에게 일방적으로 위로해달라고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개에게 그만큼의 진심어린 사랑을 보여주었는지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싶다.

  개는 우리와 '소통'을 원하지, 일방적인 '억압'을 원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다음 생에는 내가 너에게 갈게
감상문

  글을 쓰는 내내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주인"이라는 단어 때문에.

  많은 견주들이 나의 개가 다음 생에도 내게 와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하지만 나는 문득 그것조차 인간의 욕심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개는 나와 살면서 행복했을까? 내가 주는 사랑을 충분히 받아들였을까? 개도 나를 사랑할까? 내가 못해준 부분은 너무나 많은데, 다음 생까지 내게 와주길 바라는 건 나만의 욕심이 아닐까?

  물론 내게 와준다고 하면 너무 고마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내게 오길 강요하고 싶지는 않다. 좀 더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이 개의 '주인'이 아니니까 말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개의 주인이라고 인식하지만, 개에게는 주인 같은 게 없다. 그들은 우리를 가족 혹은 친구 정도로 인식하지 않을까. 가족도 친구도 늘 좋을 수만은 없다. 그런데 주인이랍시고 개에게 다음 생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 욕심이 아닐까.

  그냥 나는 나의 개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너가 너무나 좋으니까, 너를 너무나 사랑하니까. 이 다음 생에는 내가 너를 찾아 갈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너도 만약 내가 좋다면, 나를 사랑한다면,
그 다음 생에 내가 널 찾아갔을 때 날 받아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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