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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작가 Jun 25. 2020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다

소설책 [아들 도키오] 리뷰

아들 도키오
줄거리

'그레고리우스'라는 희귀 유전병에 걸린 아들 '도키오'

'다쿠미'는 아내 '레이코'와 함께 아들의 마지막을 지키기 위해 병원 대합실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과거를 더듬던 다쿠미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내에게 고백하기 시작한다.


"사실 말하고 싶은 사실이 있어. 도키오에 대해서. 옛날에 나는 도키오를 만났어."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다
숨은 의미 찾기

떡은 남의 것이 더 커보이고, 상처는 내 것이 더 커보이는 법이다.

  세상 누구나 저마다의 고통과 시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만큼의 삶을 살아간다. 그 아픔의 정도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거만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나보다 불행한 누군가를 생각해보라는 식의 오만방자하고도 무례한 말을 위로랍시고 던지는 사람을 싫어한다. 누구나 자신의 아픔이 가장 크게 보이니까.

  그럼에도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종종 '누가누가 더 힘들까' 대결을 펼치곤 한다. 그들 중에서도 유별나게 자신이 더 힘들다고,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보통 주어진 환경이 힘들다는 이유로, 자신의 남은 생마저 포기해버리기에 이른다.

  대부분은 '한 방'이라는 허황된 꿈을 쫓는 것이 마치 '의지'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는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렇게 몇 번인가 젊은 나날들을 낭비하고 나면 남는 것은 끝없는 원망 뿐이다.

  소설 주인공 다쿠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가난하고 어린 친모가 자신을 낳았으나 기를 여력이 안 되어 양부모에게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년 시절부터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쿠미는 자신의 출생 자체를 불행한 일로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흐르는대로 막 살아간다.


  타임리프 작품들은 이미 차고 넘친다. 누군가는 식상한 소재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런 비웃음이 무색하게도 이런 소재들은 늘 나올 때마다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사람들에게는 흥미롭게 여겨지는 탓이리라.

  히가시노 게이고로서는 타임리프물에 대한 도전이 '아들 도키오'로 처음이었을 것이다. 비록 이번에 새로 표지를 바꿔 출간했지만, 2008년에 나온 작품이니. 그 이후로 대박이 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만약 이 작가의 타임리프물이 더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여하튼 그가 추리소설로 전성기를 누리면서도 자기가 만든 작품의 틀에 갇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을 매 작품마다 업데이트하고 업그레이드 해간다.

  그런 모습이 작가로서 배워야 할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는 추리 트릭을 연구하지 않는다. 그건 그저 부수적인 것일 뿐이다. 작가는 '인간'에 관심이 있다. 초기 작품에서는 주로 인간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자 하는 작가의 호기심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춘다. 살면서 선택을 해야할 때 우리는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절망과 고통의 순간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고민한다.

아들 도키오는 주인공 다쿠미와 그의 아들 도키오를 통해, 확신할 수 없는 미래로 달려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한다.


"내일만이 미래가 아냐."

  언뜻 보면 우스운 말이다. 당연히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지. 모레도, 일주일 후도, 일 년 후도, 십 년 후도 미래이니까. 그러나 그 우스운 말을 곱씹다 보면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현재의 아픔에 주저앉아 불평하고 후회하고만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포기를 알기 때문에 멍청해진다.

  모든 미래가 자신이 예측한대로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오만함. 그 오만함은 인간에게 포기를 불러 일으킨다. 어차피 안 될 거야, 어차피. 그렇게 포기한 이에게는 더 이상 미래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래를 만드려고 하지 않은 자에게 미래가 오지 않는 것 뿐이다. 미래는 확실한 근거가 없어도 실천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기에. 그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자만이 무언가를 얻게 된다.

  그러나 당장의 아픔과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미래가 없을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주저앉아버리게 만든다. 그러나 살아만 있다면, 내일만이 미래가 아니다. 미래라는 것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다. 뻔한 결과가 예측되는 미래라도, 내가 당장 바꾸고자 한다면 바뀔지도 모르는 게 미래다.

그렇게 작은 현재들이 모이면 어떤 미래가 날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젊은 청춘들에게 위로 섞인 메시지를 던진다. 다쿠미의 모습은 마치 우리들을 보는 것만 같다. 단순히 한량의 일상 뿐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핑계삼아 현실을 외면하고 남의 탓을 하는 모습이 말이다. 내가 상처받고 아플 때 세상이 끝날 것만 같지만, 야속하게도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다. 지구는 내가 없어도 멀쩡하게 돌아간다.

미래는 살고자 하는 나의 현재와도 같다.

  그래서 개개인의 미래는 타인이 건드릴 수 없다. 오로지 자신만이 나의 미래에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다. 그렇기에 어떤 결과에 대해 남탓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아픔은 위로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미래, 그러니까 현재를 포기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포기하고 싶을 만큼 지독한 상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그 상처에 지지 말라는 작가의 메시지는 따뜻하고도 포근하다.

사실 지금 이 시대 젊은 나날들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작품 속에서 작가를 만난다는 
감상문

그의 책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이 작가의 책을 펼칠 때마다 늘 즐겁고 설레는 이유다. 그저 피와 살육만이 난무하는 잔혹한 소설이 아니다. 그 속에서도 사람이 있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정과 감정이 있다. 그것들이 얽히고 설켜 만들어진 이야기는 결국 우리네 삶과 닮아있다. 책 속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기쁘면서도 씁쓸한 일이다. 내가 겪는 아픔을 모든 이가 겪는다는 뜻이기에.

  그럼에도 심심한 위로를 받으며 책을 덮을 수 있어 늘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으며, 나를 만나기도 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기도 하며, 때론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작가로 귀결된다. 작품 속 인물의 입을 빌려 작가는 늘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 그래서 나는 작품 안에서 늘 작가를 만난다.

이렇게 또 한 번 히가시노 게이고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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